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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hyunsoo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
Hwanghyunsoo

 

 사회에 처음 나와 다니던 회사가 서울 광화문 근처, <구세군회관> 뒤쪽 골목에 있는 <한글회관>에 있었다. 그 건물 지하에 작은 소강당이 있었는데, 매주 금요일 저녁에 <뿌리깊은나무>잡지사가 주최하는 판소리 공연을 했다. 금요일 오전부터 공연 준비를 하느라, 5층에 있던 사무실까지 리허설하는 소리가 문틈으로 들려왔다. 한번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그 소리에 이끌려 공연장을 들여다보았는데, 그때 판소리를 처음 보게 된다.

 판소리는 공연 준비가 소박해서 무대 가운데 마이크가 놓이고, 그 오른쪽으로 고수가 북을 가지고 돗자리에 자리하면 끝이다. 명창은 흰색 치마저고리 차림에 부채를 들고, 고수는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리허설이지만, 20여 명의 스텝과 관계자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는데, 북 치는 이가 노래 부르는 중간중간에 ‘얼씨구’, ‘좋다’ 하는 추임새를 넣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 뒤에도 가끔 TV의 국악 프로그램에서 판소리를 보게 되지만, 직접 공연을 볼 때의 신선함은 느낄 수 없었다.

 판소리의 맛을 제대로 느낀 건, 1993년에 영화 <서편제>를 보고 서다. 임권택이 감독하고 배우 김명권, 오정해가 주연을 했다. 영화는 1960년대 초, 전라남도 보성 지역에서 판소리 하는 소리꾼 집안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남도의 아름다운 자연, 한을 맺고 푸는 사람들의 삶, 우리 소리의 느낌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우리 판소리가 얼마나 뛰어난 예술 장르인지를 알려준다.한국영화 최초의 100만 관객 기록을 깬 작품이기도 하다.

 신인 배우 오정해는 판소리 명창 김소희의 직계 제자로 1992년 ‘미스 춘향 선발대회’에서 진으로 선발되며 국악인에서 영화배우로 데뷔한다. 서편제에서 앞 못 보는 ‘한’을 소리로 푸는 수양딸 송화 역을 한다. “이년아! 가슴을 저미는 한이 사무쳐야 소리가 나오는 법이여…” 이 명대사로 소리꾼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영화가 히트 치자,서편제에서 오정해가 맡은 역, 딸 ‘송화’의 모델이 명창 박숙자라고 알려진다. 박숙자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서편제의 맥을 이끈 소리꾼 박동실이다. 그는 1892년 담양읍 객사리에서 태어났다. 외조부 배희곤과 부친 박장원이 명창 소리를 들었던 소리꾼 집안이었다. 박동실의 동생 영실도 판소리 명창으로 활동했다.

 

박동실은 아홉 살 때, 아버지 박장원과 명창 김재관으로부터 처음 소리를 배웠다. ‘예술적 자질이 뛰어나 소리를 배운 지 1년이 지나 춘향가를 완창했다’고 한다. 박동실은 서편제의 맥을 이으면서 동편제 소리를 섞어, 자신 만의 소리 세계를 만든다. 그에게 판소리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1934년 전남 담양군 남면 지실 마을에 정착해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이 마을에 박석기라는 후원자가 있었다. 박석기의 아버지는 아전 집안 출신으로 부를 축적해 만석꾼 소리를 들었다. 박석기는 도쿄 제국대학 불문과를 졸업했다. 그 시절의 화려한 학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배 하에서 출세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그는 민족의식에서 국악 쪽에 열정을 보였다. 명창 김소희가 박석기의 부인이고,인간문화재 김소희는 배우 오정해를 가르친다.

 당시에는 박석기처럼 지방 향리(鄕吏) 집안 출신들이 판소리를 후원함으로써 전승과 보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향리는 지방 관청에 속해 있는 하급 관리지만, 관아의 행사를 하며 판소리와 소리꾼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들은 대를 물려 관의 일을 하며 축적한 경제력으로 판소리의 후원자가 될 수 있었다.

마을에 초당을 지어 예인들을 불러 박동실에게 판소리를 가르치게 하고 박석기는 거문고를 직접 가르쳤다. 이 시기에 박동실로부터 배운 제자는 김소희, 한승호, 임춘앵, 한애순, 장월중선 등으로 나중에 한국 판소리계를 이끄는 국악인이 된다.

박동실은박석기와 함께 <화랑 창극단>을 결성해 공연을 했다. 박동실은 작곡 능력도 뛰어나 ‘열사가’, ‘김유신 보국가’, ‘해방가’ 같은 작품을 만들어 곡을 붙였다. 이준,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으로 이어지는 ‘열사가’는 1960년대까지 활발하게 공연 목록에 올랐다. 단가 ‘사철가’의 작사 작곡도 박동실의 작품이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 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 나도 어제 청춘 이러니 오 날 백발 한심하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 들 쓸 데 있나/ 봄아 왔다가 가려 거든 가거라

박동실은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민족의식과 소리 광대로서 신분 차별에 대한 반감 등으로 사회주의 의식이 있었다. 미군정에 의해 체포령이 떨어지자 숨어 지내다가 6.25 전쟁 중에 북으로 넘어간다. 그때부터 판소리계에서는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금기시됐다. 그에게 소리를 배운 제자들조차 한 동안 스승의 이름을 드러내기를 주저했다.

그는 북에서 공훈배우를 거쳐 1961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중국에서 북경, 선양, 연변 등 조선족이 많이 사는 지역을 돌며 순회공연을 했다. 그가 완성한 ‘판소리 5가’는 북한에서 국보처럼 여기는 <민족 음악대 전집>에 실렸다. 그는 평양에서 독신으로 살며 1968년, 71세로 세상을 떠난다.

박동실의 행적이 알려지게 되는 것은 그의 딸 박숙자가 알려 지면서다. 박숙자는 영화 <서편제> 여주인공의 모델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대중가수 김정호의 어머니였다. 그러니까 월북한 명창 박동실 선생이 김정호의 외할아버지다.

김정호는 가장 한국적인 포크를 노래하던 싱어 송 라이터로 1970년대를 감동시킨 천재 가수다. 1952년 광주에서 태어난 그는 대동상고 밴드부 시절부터 노래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후, 어머니의 반대로 기타를 메고 집을 나와 방랑 생활을 한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힘들고 고된 소리꾼 생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고, 외할아버지가 월북한 사실이 알려지는 것도 두려웠다. 1970년대 초, 미 8군 무대에서노래하고, <4월과 5월>의 멤버로 잠시 활동하다가 ‘사랑의 진실, ‘작은새’를히트시키며 홀로 무대에 선다. 통기타를 가슴에 끌어안은 채 눈을 지그시 감고 꿈꾸듯 독특한 모습으로 노래해 매스컴을 타자 바로 정상에 오른다.

 

 

그 후, 이름 모를 소녀’, ‘하얀 나비’, ‘저 별과 달은’, ‘달맞이꽃’ 등 50여 곡의 불후의 명곡을 만들고 불렀다. 하지만,1976년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음악적 사형 선고를 받는다. 이 사건으로 4년 동안 무대에 설 수 없었는데, 1979년 대마초 가수들이 해금이 되어 방송으로 돌아왔지만, 무슨 이유였는지 그는 보이지 않았다. 벌써부터 김정호는 폐결핵으로 요양원을 드나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에 그를 보려면 명동의 라이브 술집으로 가야 했다. 명동 유네스코 회관 뒷골목에 있는 <마음과 마음> 옆 지하에 있던 맥주집<청맥>에 가면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듬지 않은 긴 머리에 창백한 얼굴, 겁먹은 듯한 큰 눈. 힘겹게 노래 부르면 얼룩진 땀이 목에서부터 가슴까지 흘러내렸다.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에는 한국인의 묘한 정서, ‘한’이 서려 있었다.

1985년 여름, 그는 방송에 다시 나왔지만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았다. 폐결핵으로 싸우던 김정호는 그해 11월을 넘기지 못하고 33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난다. 1년 뒤 그의 동료들은 고인의 묘지에 ‘하얀 나비’ 노래비를 세운다.

꽃잎은 시들어요/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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