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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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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hyunsoo
황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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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5
어머니의 오그랑떡

 

 드디어 코비드-19 백신을 맞았다. 우리 집은 리치먼드 힐(Richmond Hill)이어서 욕(York)지역 커뮤니티 사이트에 들어가 신청을 했더니, 바로 접종 날짜를 주었다. 후유증이 있다고 ‘맞아야 되나, 미뤄야 되나’ 하는 얘기가 있었지만 나는 백신을  맞은 날 밤에 좀 어깨가 뻐근할 정도였고 이틀이 지나서는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화이자(Pfizer) 주사를 맞았는데 2차 접종은 112일 뒤에나 맞을 예정이다.

 백신을 맞은 다음날, 아내가 팥죽을 끓였다. 속으로 ‘4월에 갑자기 웬 팥죽 하며…’ 맛있게 한 그릇을 잘 먹었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아마 액운이 떨어지라고 팥죽을 쑨 것으로 짐작된다.

동짓날 팥죽 쑤어 먹는 풍속은 중국에서 온 것이다. 중국 신화에 나오는 공공씨(共工氏)는 황하를 다스리는 신이었다. 황하의 홍수로 인해 강물이 범람해 그의 아들이 죽었다. 죽은 아들은 역귀(疫鬼)가 되어 수인성 전염병을 퍼트리는데, 병에 걸린 사람들이 뜨거운 팥죽을 끓여 먹고 영양을 보충해 병을 이겨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그 즈음부터 붉은 색깔의 팥은 ‘양’을 상징하므로 ‘음’의 속성을 가지는 역귀나 잡귀를 물리친다고 알려진다.

아침마다 새벽 기도를 다니실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도 생전에 팥죽에 대한 이런 믿음이 강했다. 팥죽을 먹으면 병에 걸리지 않고 나쁜 일도 생기지 않는다고 믿었다. 자신의 편안 때문이 아니라 자식들의 건강과 앞날을 위해서였다.

동짓날은 물론이고 새로 이사를 가면 팥죽을 쑤어 이웃과 나눠 먹었다. ‘병이나 액운은 나만 괜찮으면 되는 게 아니고 이웃도 함께 해야 한다’ 라는 예부터 내려온 질기고 거룩한 믿음을 신뢰한 것이다.

이곳 토론토에서도 팥죽을 잘하는 음식점이 있다. 노스욕(North York)에 있는 <핀치 정수네 뚝배기>다. 이 집은 팥죽과 비슷한 팥칼국수도 파는데, 진한 팥 국물에 칼국수 면을 제대로 우려내 고국의 시장에서 먹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팥칼국수는 원래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먹었는데 팥물을 끓인 후 가라앉은 앙금에 밀가루로 만든 면을 넣고 끓여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하여 만든다. 팥칼국수를 먹을 때 전라도 방언으로 ‘싱건지’라 불리는 동치미와 묵은 김치를 곁들여 먹어야 제 맛이다.

 토론토 한인타운(Koreatown)에도 팥죽을 하는 곳이 있는데, 블루어(Bloor St.)와 크리스티(Christie St.)에 있는 <만나>이다. 이곳은 팥죽뿐만 아니라 호박죽, 깨죽 등도 판다.

 차이니스 레스토랑에도 팥죽을 파는 곳이 있는데, 우리 죽처럼 팥을 곱게 갈아 걸쭉하게 쑨 것이 아니고 알갱이를 푹 삶은 팥물에 단 맛을 낸 것이어서 그리 깊은 맛은 없다. 주로 메인 음식을 먹은 후에 후식으로 먹는데 콘지(congee)를 파는 음식점은 대부분 팔고 있다.

 

 

 어머니는 팥죽 말고도 오그랑떡이라는 것을 자주 만드셨다. 오그랑떡은 멥쌀가루를 익반죽 하여 경단을 빚어서 팥과 같이 부드럽게 삶아낸 떡이다. 떡을 삶을 때 그 모양이 동그랗게 오그라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오그랑떡은 주로 함경도 지방에서 발달했는데, 다른 떡에 비해 부드럽고 말랑해 어린이나 노인들이 먹기 좋다. 떡의 주 재료인 붉은팥은 밥맛이 없거나 잠이 안 올 때, 신경쇠약 증세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떡을 만들 때는 약한 불에서 팥물이 경단에 배이게 은근히 끓여주어야 부드럽고 맛있는 오그랑떡을 만들 수 있다. 어렸을 적에 나는 오그랑떡을 만든 날이면 보자기에 싼 떡을 들고 어머니를 도와 근처 친척집으로 날랐던 기억이 있다.

 떡은 곡식을 가루 내어 찌거나 삶거나 기름으로 지져서 만든다. 찌는 떡은 만드는 과정이 좀 복잡해서 가정에서 만들기 쉽지 않지만, 삶은 떡과 지지는 떡은 비교적 만들기가 간편해 가정에서 많이 만들어 먹었다.

 

 

토론토로 이민 오기 전에 ‘혹시 떡장사나 한번 해볼까’ 해서 떡집 자료조사를 한 적이 있다. 기억나는 곳이 서대문구 이화여대 앞에 있는 <호원당>이라는 곳이었는데, 마침 친구가 그곳 제품 포장 디자인을 하고 있어서 벤치마킹을 했었다.

<호원당>은 3대가 이어온 유서 깊은 떡집인데, 진기한 궁중떡을 일반화한 고급 떡집이다. 그래서 이런 고급 떡을 해외에서 만들어 팔면 어떨까 싶었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오래된 교민들은 가정에서 웬만한 떡은 만들어 먹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교민들의 생활수준이 고급 떡을 사 먹을 정도의 경제적 환경도 아니어서, 떡장사는 머릿속 구상으로 그치고 말았다.

요즘은 좋은 떡집들이 많은데, 페이스북의 <토론토 맛집>이 추천한 <달제과(Luna Bakery)>이라는 곳은 매일 새로운 전통떡을 만들어 선보인다. 손힐(Thornhill)의 돈캐스터(Doncaster Ave.)에 있는데, 일반 슈퍼에는 납품하지 않고 자체 매장에서만 판매하는 곳이어서 가격이 조금 비싸지만 신선하고 맛있다. 소량을 만들어 당일에 재고 없이 다 파는데, 가끔 오그랑떡 비슷한 새알로 만든 단팥죽도 맛볼 수 있다.

 떡은 사람 사이에서 ‘끈적끈적한 관계’를 뜻한다. 그래서 떡은 이웃과 고루 나눠 먹었다. 예부터 ‘덕(德)과 떡은 나눠 먹으면 훈훈하고 더 맛있다’고 한다. ‘떡’ 자에서 ‘ㄷ’ 하나만 떨어지면 덕이라고, 떡의 어원이 덕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원의 옳고 그름을 떠나, 덕은 베풀어야 하고 떡은 나누어야 떡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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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hyunsoo
황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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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8
‘와룡매’가 알리는 조선 침탈

 

 5년 전 서울에 계시던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황망하게 지내던 때, 여수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촌동생이 “바람 쐬러 한번 내려오세요”해서 갔었다. ‘근처 순천에 있는 선암사나 다녀오자’라고 해서 따라나서는데, 사찰에 오르며 복잡하고 어수선한 마음이 안정되는 분위기였다. 주차장에서 절까지 오르는 길이 넓게 잘 닦여져 있었고 도로 양옆에 늘어선 나무들도 꽤 나이를 먹은 듯 풍치를 보탰다. 아직 쌀쌀한 겨울이어서인지 산사는 매우 조용하고 사람들이 없었다. 안내를 해준 사촌동생이 좀 머쓱했는지 “절부터 운수암까지 오르는 담길에 있는 50여 그루의 매화나무에 꽃이 필 때면 많은 관광객이 온다”고 귀띔한다.

 선암사에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백매화와 홍매화 나무가 있는데, 사찰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에 심은 것이라 한다. 우리가 갔을 때는 아직 매화가 피지 않았지만 가지만으로도 그 틀의 기품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매화는 봄이 왔음을 알리는 꽃이다. 매화꽃 위로 눈이 내리면 설중매, 달 밝은 밤에 보면 월매, 옥같이 곱다 해서 옥매, 향기를 강해 매향이라 한다. 조선시대에 양반가의 선비들이나 풍류를 즐기던 시인들은 매화를 사랑했다. 이들 양반가들을 주 고객으로 했던 옛 기생들의 이름에도 매화가 많이 들어갔는데, <춘향전>에서 성춘향 엄마의 이름이 월매이기도 하다. 조선 양반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매화를 좋아했다.

 일본 동북지방 미야기 현, 마쓰시마에 가면 즈이간지(瑞巖寺)라는 사찰이 있는데 그 앞마당에 800여 년이 된 매화나무 두 그루가 있다. 옛날 이 고장의 영주였던 다테 마사무네가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고 조선에 출병했다가 전리품으로 가져온 것이다.

 이 조선 매화는 용이 누워 있는 것 같다 하여 '와룡매(臥龍梅)'로 이름 지어졌다. 본당에서 바라볼 때 왼쪽은 붉은 꽃을 피워내는 홍매화이고, 오른쪽은 하얀 꽃잎을 내미는 백매화다. 이 꽃들은 해마다 4월 중순쯤 꽃망울을 터트려 보름가량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영주였던 다테 마사무네는 예술가적 심미안을 지녔던 인물로 일본 내에서 처음으로 로마 교황청에 사절단을 파견할만큼 의식이 앞섰다. 다섯 살 때 천연두에 걸려 한쪽 눈을 잃은 마사무네는 애꾸눈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였는지, 임진왜란이 나자 전시 첫해에는 동원력의 두 배인 3천 명을 보낸다. 또한 이듬해는 직접 바다를 건너가 진주성을 공략하는데 그때 나이가 27살이었다. 부산을 거쳐 한양까지 거침없이 올라가 창덕궁까지 진격한다. 그곳 선정전 앞에 있던 400년 된 와룡매에 반해 전리품으로 뽑아 챙긴다. 6개월간 참전한 후, 일본으로 귀국할 때 그 조선 매화를 가져와 가문의 선종 사찰인 즈이간지에 심은 것이다. 

 

 제2차 대전 당시 이 지역은 미군의 폭격을 받아 대부분 초토화됐지만 이 사찰은 가까스로 화를 면해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고 조선 매화 역시 본당 앞마당을 지키며 푸르름을 떨치고 있다. 이 절의 조선 매화가 1999년에 자목(子木)의 형태로 귀환해 눈길을 모은 바 있다. 두 그루에서 얻어낸 자목을 사찰 측이 일제의 한국 침탈을 참회하는 의미로 서울 남산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기증한 것이다. 약 400년의 세월을 건너 분신으로나마 고국에 돌아온 셈이다.

 이 사찰 근처에 있는 마쓰시마는 일본의 3대 절경으로 꼽힐 정도로 풍경이 좋은 곳이다.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도 1970년대 중반에 이곳에 있는 도호쿠대학을 자주 찾았다. 반도체의 세계적 권위자인 니시자와 준이치 교수에게 자문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삼성이 반도체 부문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니시자와 준이치 교수는 이병철에게 ‘반도체 사업을 하지 마라’고 했다. 그만큼 개발도 어렵고 한국의 과학기술로는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이병철은 “일본이 할 수 있으면 한국도 할 수 있다”며 밀어붙였다. 초창기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무척 어려워서 가전부문에서 번 돈을 빈도체에 다 쏟아 부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 결단이 삼성뿐만 아니라 한국이 IT 산업국으로 가는 계기가 된다. 당시 도호쿠대학을 방문했을 때 이병철이 근처에 있던 즈이간즈 사찰을 갔을 거라는 짐작을 한다. 혹시 이병철은 와룡매를 보며 용처럼 뻗어 나가는 반도체 사업을 구상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곳 토론토에서는 매화나무를 구경하기 쉽지 않다. 그나마 매화나무를 좋아하는 몇몇 한국 교민들이 집에다 관상용으로 심어 놓은 것이 전부다. 매화는 영어로 팜(Plum)이지만, 묘목 파는 곳에 가서 팜을 찾으면 대개 모른다. 그래서 시로 팜(Shiro Plum)이라고 해야 알아듣는데, 그나마도 있는 곳이 거의 없고 가격도 비싸다. 공원이나 들에 매화나무처럼 생긴 것이 있어 가까이 가 보면 대개 벚꽃나무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 후에 캐나다 정부에게 기증한 것들이 새끼를 쳐서 공원마다 심어져 있다. 일본은 벚꽃 외교를 전 세계적으로 펼치고 있는데, 그래서 세계 주요 도시마다 벚꽃을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미국 워싱턴 벚꽃인데 특히 포토맥 강변의 매화는 봄철 세계적인 관광거리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일본 사찰에 있는 와룡매는 자연스럽게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의 조선 침략과 약탈을 스스로 알리고 있다. 조선 창덕궁의 와룡매를 일본에 가져 간, 마사무네의 유훈이다. "어짐이 지나치면 약하게 되고, 의로움이 지나치면 고집스럽게 되고, 예의가 지나치면 아첨하게 되고, 지혜가 지나치면 남을 속이게 되며, 믿음이 지나치면 손해를 입게 된다" 우리 조선에게 주는 가르침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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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1
매화나무에 참새가 앉은 모습, ‘매작과’

 

 신입사원 시절, 일년에 두번 정도 돌아가며 숙직을 섰다.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 근무했는데, 주로 시청자들의 민원전화를 받거나 비상시에 담당부서에 연락하는 것이 주업무다. 경력사원과 신입사원이 2인 1조로 숙직을 했는데, 전화는 주로 후배가 받았다.

 

 밤 11시경에 벨이 울렸다. “네, 엠비씸니다.” 상대방이 대뜸, “야, 사장 바꿔!” 놀라서, “네? 누구시죠?” 술을 한잔 드신 듯 무턱대고 “느네가 이렇게 드라마를 엉망으로 만드니까, 나라꼴이 이 모양이지. 무슨 고려시대에 시녀들 옷이 다 조선시대 것이니 말이 되냐?”하며 시비조로 시작한 대화가 20여 분이 지나도 끊지를 않자, 옆에서 듣고 있던 선배가 그냥 끓어 버리라고 사인을 계속 보낸다.

 그래서 “네, 예~ 알겠습니다.” 하며 대충 얼버무리고 끓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 전화해댔다. 그 목소리다 싶으면 바로 끊었다. 그렇게 5~6번째 벨이 울리자 참다못한 선배가 전화를 받아 “여보세요. 누구신지 성함과 전화번호를 알려주십시오?” “뭐, 내가 누군지, 니가 알면 어떡할 거야” 선배가 “성함을 말씀하셔야 저희가 조치를…”

 “뭔, 개수작이야. 나랑 한번 해보겠다는 거야? 그러니까, 엠비시를 안 보는 거야.” 선배가 “뭐라고요? 어르신, 말씀이 지나치신 것…” 하자, “야, 이 새끼야! 이제부터 다시는 엠비시 안본다…”며 욕을 하자 선배가 화가 나서 “그러면 보지 마세요” 하며 수화기를 던져 버렸다. 나는 놀라 재빨리 전화선을 뽑아 버렸다.

 1980년대의 웃지 못할 방송사 숙직실 모습이다. 당시 사극 드라마 경우에는 제작비가 충분치 않아서 주요 배역들이 아닌 시녀, 포졸 같은 단역배우의 의상은 시대와 상관없이 거의 비슷한 의상을 돌려가며 입었다. 무대 배경도 지금처럼 야외 촬영이 아니라 스튜디오 촬영이 대부분이어서 무대 배경이나 소품들이 시대에 맞지 않게 엉뚱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사극 드라마가 방영된 날에는 이런 비슷한 항의 전화가 많았다.

 지난주에 SBS 퓨전사극 <조선구마사>가 방영 2회 만에 전격 폐지됐다. 역사 왜곡 논란으로 여론이 악화되자 누리꾼들의 압력을 버티지 못한 것으로 풀이된다. SBS에 따르면 애초 16부작으로 기획됐던 드라마는 80% 촬영을 마친 상황이라고 한다. 제작비도 320억 원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구마사>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태종과 훗날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이 악령에 맞서 벌이는 혈투를 그린 판타지 드라마다. 첫주 방송이 나가자마자 중국풍 논란에 휩싸였다. 첫 회에 방송된 연회장면이 문제가 됐다. 중국 명나라를 통해 조선에 들어온 가톨릭 구마 사제를 맞이한 식탁에 월병, 삭힌 오리알, 중국식 만두 등이 올랐고, 극중 의상과 군사들이 사용하는 검(劍)이 중국 것이란 지적을 받았다.

 동북공정으로 커지는 반중 정서에 불을 지피며 시청자 불만이 폭발하자 주요 광고주들이 광고 철회를 한다. 실제로 중국에서 일부 누리꾼들이 <조선구마사>의 해당 내용을 지적하면서 "한국은 중국문화를 베껴갔다"는 식으로 공격한다는 보도가 전해지면서 서둘러 드라마를 내린 것이다.

 

 하지만 무슨 판타지 드라마에 그렇게까지 의미를 둘 필요가 있냐는 의견도 있다. 음식평론가 황교익은 페이스북에 “한국 TV 역사 드라마는 몇몇 등장인물 외에는 완벽한 판타지”라며 “<대장금>에 나오는 음식은 조선에 있었다고 생각하세요?”라는 글을 올렸다.

 이어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볼까”라며 “조선 왕이 장금이 같은 궁녀가 요리한 음식 먹으며 이게 맛있네 저게 맛없네 품평을 했다고 생각하나? 판타지면 판타지로 보고 말지”라는 글을 올리기도 한다.

 나는 아무리 판타지 드라마라도 조선 식탁에 중국의 대표과자인 월병을 놓은 것은 세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 지나간 일이지만 월병 대신, 조선다과로 바꿨으면 어땠을까 싶다. 조선다과인 매작과(梅雀菓) 말이다. 매작과는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과자다. 밀가루에 참기름, 꿀을 넣고 기름에 지져서 만드는 후식이다. 옛날에는 제사, 혼례, 연등회 등에 많이 쓰였고 주로 명절에 만들어 먹었다.

 


 매작과는 밀가루를 기름에 튀겨 만드는데 여러가지 천연재료를 섞어 다양한 색상과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 매작과는 이름부터 아름답다. 매화 매(梅), 참새 작(雀)을 써서 매작과(梅雀菓)라고 부르는데, 과자의 모양이 ‘마치 매화나무에 참새가 앉은 모양과 같다’는 뜻을 갖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밀가루로 튀긴 유밀과를 만들어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는 불교국가라 살생을 금했기에 어육류를 제사상에 올릴 수 없었는데, 그것 대용으로 물고기 모양의 유밀과나 매작과 따위를 제사상에 올렸다. 튀김 과자의 소비량이 지나치게 많아지자 제사상에 유밀과 대신 과일을 올리게 했다고 한다. 그만큼 밀가루와 기름이 비싸고 귀했던 시절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매작과를 좋아했다. 그 당시 고려병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지금도 몽골의 과자 중에는 이 때의 교류로 영향을 받은 매작과와 모양이 비슷한 과자가 있다고 한다.

 또한 춘향전에서 암행어사 이몽룡이 출두할 때 변사또가 한손에 매작과를 들고 깨작거리고 있는 장면이 있다. 변학도는 남원(도호) 부사인데 도호부사는 종3품 관직이다. 현대 군대로 치면 준장급이다.

 당시 밀가루나 조청이나 모두 사치재로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정승급조차도 사사로이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는데 일개 도호부사가 매작과를 먹어댔으니 얼마나 부정부패와 수탈로 얼룩진 자인지 알만한 노릇이었다.

 한편에 20억 정도를 드린 드라마가 누리꾼들에 의해 바로 내려지는 시대가 되었다. 셀폰의 인공지능 앱으로 중무장한 똑똑하고 적극적인 시청자들 때문에 이제 과자 하나라도 허투루 놓았다가는 곤욕을 치를 수 있다. 그때그때 검증과 확인을 거쳐 뜻을 같이 하는 누리꾼들을 모아 여론을 모은다. 돌이켜 보면 1980년대 숙직실에 전화를 했던 누리꾼들은 진정한 열성 사극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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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hyunsoo
황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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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5
굳이 먼 데를 기웃거리지 마라

 

 몇 주 전부터 식탁에 앉아 밥 먹을 때면 초파리가 날아다녔다. 처음에는 한 두 마리가 보이더니 며칠 전부터는 음식만 차려 놓으면 떼지어서 주인보다 먼저 맛을 본다. 그러려니 하면 되는데 그걸 또 못 참아서 양손으로 손뼉 쳐 잡기도 하고 앉아 있는 놈을 살며시 검지로 누르기도 하는데 워낙 빨라 좀처럼 잡을 수 없다.

 초파리의 이동을 눈여겨보니, 지난 겨울에 파 두 단을 심어 놓은 화분에서 이착륙을 하느라 바쁘다. 화분에다 알을 깐 것이다. 그래서 아예 그 화분을 밖으로 내놨는데도 초파리들은 계속 줄지 않았다. 파 심어 놓은 화분 옆, 알로에 화분 두 개도 의심스러워 밖에 내놓았지만, 초파리는 없어지지 않았다. 내친김에 화분 옆 환기통도 테이프로 막고, 조금 떨어져 있던 제라늄 화분도 내놨다. 그리고 이것저것 찾아보니, “화분 위 흙을 가는 모래로 막아 주면 초파리들이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해서 관상용 모래를 좀 사다가 남은 화분들을 덮어주었다. 그제서야 티끌같은 놈들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보람 뒤에는 밤 사이 추위를 이기지 못했던 알로에와 제라늄의 장렬한 희생이 있었다.

 그래도 초파리는 좀 낫다. 아직은 날씨가 쌀쌀해 나타나지 않지만 조금만 있으면 모기들 차례다. 한국의 모기들은 물리고 난 뒤 근지러워서 알게 되지만, 이곳 토론토 모기들은 힘이 좋은지 물리는 순간부터 무척 따갑다. 그래서 늦은 봄부터 가을 초까지 야외에서는 모기를 조심해야 한다. 트레킹을 하다가 조금만 길을 벗어나 숲이나 잡초 사이를 지나려면 모기 밥이 되는 걸 각오해야 한다.

 며칠 전 책장에서 다산 정약용의 책을 우연히 찾았다. 10여 년 전에 한국 갔다가 오는 길에 사왔는데 앞에 몇 줄 읽고 접어 둔 것이다. 이번에 찾아 반가운 마음에 620여 쪽을 사흘에 나누어 다 읽었다. ‘왜 진작 보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흥미로운 내용들이 꼬리에 꼬리를 이어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정민 교수가 쓴 <다산선생 지식 경영법>이다. 쉽게 말해 다산의 공부법을 정리한 것이다. 다산은 18년간의 강진 유배 생활 동안 수백 권의 저술을 남겼는데, 한 사람이 베껴 쓰는 데만도 10년이 걸릴 정도의 작업을 그 척박한 작업 환경 속에서 해냈다.

 다산도 모기를 무척 싫어했다. ‘모기를 증오한다(증문·憎蚊)’는 글까지 남길 정도였다. 귀향 가 있던 강진에서 1804년(43세) 여름에 지은 것인데, 모기를 맹호나 뱀보다 무서운 존재로 묘사했다.

“사나운 호랑이가 울 밑에서 으르렁대도 나는 코 골며 잠잘 수 있다. 구렁이 한 마리 처마 끝에 걸려 있어도 그저 누워서 똬리 트는 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모기 한 놈 앵앵대는 소리 귀에 들리면, 나는 기겁하고 만다. 오장이 졸아붙고 간담이 서늘해진다. 모기 너는 주둥이를 박아서 피를 빨면 그것으로 족해야지, 어이하여 독을 쏘아 뼛속까지 스며들게 하느냐. 삼베 이불 꼭 덮고서 이마만 겨우 내놓아도 잠깐 만에 울퉁불퉁 부처 머리 같아진다.”

 모기들의 횡포에 속수무책 시달리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한 자신의 처지를 답답해했다. 다산은 부패한 세상에 분노하고, 자신의 큰 뜻을 펴지 못한 절망을 시문으로 달랬다.

 1994년에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기행문이 발표되고, 인문 도서 최초로 백만 부를 돌파하며 남도 답사 열풍을 몰고 왔다. 나도 그 유행 따라서 강진 다산초당에 콧바람 쐬러 간 적이 있다. 그때는 다산에 대해 그리 관심도 없고 그저 조선의 실학자 정도로 알고 있을 때였다. 강진 읍내에서 다산 초산까지 걸어서 올라갔는데, 당시만 해도 여기가 다산초당이 맞나 싶을 정도로 팻말도 없고 진입로도 찾기 어려웠다. 산 깊은 곳에 위치한 다산초당은 가는 길은 등산로였다. 입구에서 10여분 정도 올라 가면 있었는데, 정비된 길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길이었고 빽빽한 동백나무 숲으로 둘러 싸여 있어 들어서자마자 깊은 숲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초가을이었지만, 올라가는 동안 사람을 마주치지 않다 보니 심리적으로 멀게 느껴졌고 거친 숨을 쉴 정도로 힘이 들었다. 다산초당은 기와집 두 채였는데, 원래는 초가집이었던 것을 복원할 때 기와로 지은 것이라 했다. 외딴곳이라 엉성한 관리로 방안에 곳곳에 흙 먼지며 나뭇잎들이 있을 정도였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네모난 연못, 채마밭, 개울에서 물을 끌어와 작은 폭포를 만들고, 돌을 쌓아 동그란 섬을 만들었다”고 정원을 멋있게 표현했는데, 내 눈에는 그저 귀향 온 사람이 자취 생활한 흔적으로만 보여 좀 실망했다.

 

 이번에 다산의 책을 읽다 보니, 당시 내가 얼마나 눈이 어두웠는지를 깨달았다. 원래 초당은 말 그대로 초가집 한 채가 덩그러니 있을 뿐인 초라한 공간이었다. 다산이 이 곳으로 옮겨온 뒤에 초당은 점점 환한 공간으로 바뀐다. 먼저 비탈을 깎아 아홉 층으로 돌계단을 쌓고, 거기에 채마밭을 만들었다. 층마다 씨앗을 구분해서 뿌렸다. 무와 부추, 늦 파와 올 배추, 쑥갓과 가지를 심었다. 아욱, 겨자, 상, 토란 등도 심었다. 시늉만 낸 작은 연못도 넓게 팠다. 둘레에 있던 떡갈나무와 싸리나무는 베어내고 대신 단풍나무와 느릅나무를 심었다.  대통을 이어 샘물을 끌어들였다. 새끼 물고기도 몇 되 풀어놓았다. 올챙이도 거기서 자랐다. 울타리가 터진 곳은 대나무로 채우고, 양편 언덕엔 버드나무를 심었다. 백련사 스님이 연뿌리를 보내왔다. 당귀, 작약, 부양, 수구화, 모란이 여기저기서 돋아났다. 파초를 구해 심었다. 포도덩굴은 울타리를 타고 올랐다. 바닷가에서 온갖 기이한 모양의 괴석을 주워 마당 곳곳에 꾸몄다. 이렇게 해서 초당은 온전히 다산의 체취가 스민 공간으로 거듭났다. 초파리와 모기 같은 벌레들에게도 훌륭한 정원이었다. 

 다산은 말한다. 일상의 공간에 마음을 쏟아라. 굳이 먼데를 기웃거리지 마라. 내가 사는 공간에 정성을 쏟아 그곳에서 일상의 기쁨을 만끽하라. 몸은 비록 티끌 세상에 묶여 있어도 마음은 훨훨 자유로운 경계 속에 노닐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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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8
이병철 맏손녀의 영화 사랑

 지난해 이맘때, 한국 언론의 관심은 <코비드 19>보다는 “<기생충>이 오스카상을 받느냐?”였다. “아마, 아카데미 수상은 어려울 것 같다”라고 많은 평론가들이 말했지만 시상식에서 무려 4개의 상을 받아 우리를 놀라게 했다. 당시 봉준호 감독은 벌써 세 번이나 무대에 올라와 수상소감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작품상을 수상할 때 감독과 배우, 스텝이 우르르 올라왔다. 봉 감독이 제작자 곽신애 대표에게 수상소감을 부탁한다. 그 뒤를 이어 자그마한 여인이 말을 이어가는데, 그때까지 시청자들은 “저 여자는 누구지? 어느 장면에서 나왔더라?”하며 의아해했다. 붉은색 머리를 위로 꼬아 올리고 검은 빈티지 재킷을 입은 여인이었다. 미리 준비한 듯 고급진 영어에 “아, 배우 중에 통역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대표로 소감을 준비했나 보다”라고 생각한다.

 다음날 언론은 <기생충>이 오스카상을 받은 것 이상으로 마지막 수상소감을 한 여인에 대해 주목한다. 그녀는 CJ그룹 이미경 부회장이었다. 그런데 “아니, 영화에 돈 투자하면 다냐?”라든가, “잘난 체하며 언니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등의 부정적인 기사가 신문을 도배한다. 하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을 잘 아는 비평가들이 “원래 작품상 소감은 제작자들이 하는게 관례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분위기가 바뀐다. 이 부회장은 <기생충>의 책임 프로듀서로 참여했고 영화 배급도 담당했기에 그녀의 수상소감은 당연하다는 설명이다. 또한 영화홍보와 수상을 위해 100억 원에 달하는 비용을 지원했다는 가십성 기사가 돌며 여론을 긍정으로 만든다.

 한국인의 대개는 부자가 되고 싶어 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부자를 싫어한다. 그래서 부자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면서도 뒤로는 경시하거나 깔보며 묘한 감정을 즐기기도 한다. 이 부회장의 수상소감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그런 마음이 깔려 있던 건 아닐까 싶다. 영화 전문가들은 “그녀가 수상소감을 한 것은 <기생충> 관계자들이 미리 준비한 순서였다”고 한다. 그녀는 평소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거북해한다. 그래서 소심한 편이고 유전성 신경질환으로 거동이 자유롭지 못해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싫어하지만 당일은 한국관객들에게 감사의 마음 전하고 싶어 용기를 냈다는 것이다.

 이미경은 선친이 유학 중이던 1958년 미국 미시간주에서 태어난다. 아버지가 이건희 회장의 형인 이맹희이다. 이맹희는 삼성가의 맏아들이었지만 아버지 이병철과 사이가 안 좋았다. 그렇지만, 이병철은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야무진 맏손녀 이미경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아마 이맹희가 삼성을 승계받았다면 이미경의 삶도 달라졌을텐데…”라는 생각을 해본다. 경기여고와 서울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학원에서 석사를 했는데, 그때부터 한국문화 콘텐츠를 바탕으로 한국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결혼은 평범한 회사 사원인 김석기와 했다가 이혼하는데 슬하에 자식은 없다. 그후 전 남편은 배우 윤석화와 재혼했고 이미경은 혼자 살고 있다. ‘영화에 미친 일벌레’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추진력이 강하고, 그녀 스스로가 “나는 이병철 회장의 DNA가 흐르고 있다”는 자부심도 강하다.

 한국영화의 세계 시장 진출은 CJ그룹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CJ는 미국 할리우드에 2004년에 진출하는데, 단순히 한국영화 수출 수준이 아닌 제작사로서 직접 참여하는 방식이었다. 그 중심에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있다. 2014년 말, 이 부회장이 갑작스럽게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데, 수감 중이었던 이재현 회장을 대신해 의욕적으로 그룹을 이끌어오던 때라 말들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재판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이 이미경 부회장의 퇴진을 압박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청와대 조원동 전 수석은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CJ가 걱정된다. 손경식 회장이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그만두고 이미경 부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얘기를 들었고, 이를 손경식 회장에게 전한다.

 이 부회장이 박근혜 정부로부터 미운털이 박힌 배경에는 CJ그룹이 제작한 방송 문화 콘텐츠 때문이다. 국가정보원은 2013년 8월부터 CJ그룹을 사찰한 뒤 ‘CJ의 좌편향 문화사업 확장’을 청와대에 보고한다. 여기에는 tvN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패러디한 캐릭터가 ‘욕설을 가장 많이 하고 안하무인의 인물로 묘사했다’는 지적을 한다. 당시 대선을 앞두고 있던 박 전 대통령은 이에 대해 몹시 불편해했다.

 이밖에도 CJ는 <광해, 왕이 된 남자>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재로 한 영화 <변호인>등 좌파 계열의 영화에 투자하며 박근혜 정부의 미움을 산다. 이병철의 맏손녀가 좌파라고? CJ와 좌파, 얼핏 봐도 잘 납득이 가질 않는 조합이었는데, 영화 투자를 좌우 진영논리로 본 것부터 균형없는 시각이었다는 평이 많았다.

 

 이 부회장은 경영에서 물러나 미국에 가있는 동안 영화산업을 직접 챙겼다. CJ가 공들이는 지역은 세계 영화시장의 본거지인 ‘할리우드’였다. CJ 엔터테인먼트는 이미 미국 영화업계에서도 ‘아시아에서도 가장 역동적인 스튜디오이자 제작사’로 평가받고 있고, 작품 10여 편을 미국 제작사들과 공동으로 제작하고 있다.

 CJ가 미국 진출 초기에 노렸던 타깃은 미국에 살고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 1200만 명과 한국계 미국인 200만 명이었다. 미주지역 아시아계 영화의 유통, 배급의 60%를 CJ가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CJ는 미국에서 영화관도 직접 운영한다. 현재 CGV는 한국 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LA의 한인타운 근처와 오렌지카운티의 부에나파크,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에 멀티플렉스 극장을 직접 운영하며 25개의 상영관을 가지고 있다.

 CJ 덕인지, 10여 년 전부터 이곳 토론토에서도 한국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다. 한국 개봉작을 미국과 캐나다에서도 같은날 상영하니, 따끈따끈한 고국문화를 즐기게 된 것이다. 앞으로도 CJ 같은 기업들이 한국영화 투자를 계속해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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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1
“아재, 즉금 무스 거 하오?”

 

 우리 어머니는 1931년에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셨다. 다섯 살 때 부모님을 따라서 두만강을 건너 지금의 길림성 연길로 간다. 연길에서 차로 2시간 정도 더 들어가면 왕청현 하마탕이라는 마을이 나오는데, 조선인 100여 가구가 모여 담을 쌓고 성을 쌓아 그 안에서 농사짓고, 가축도 키우며 살았다고 한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호랑이, 토끼, 노루 등 야생 짐승도 잡아먹는 험한 산골이었고, 비적(도적떼)들이 나타나면 동네사람들이 힘을 모아 싸울 정도로 척박한 오지였다.

 

 그러다가 광복을 맞이한 다음 해인 열다섯 살 때, 회령에 있는 이모네로 혼자 살러 간다. 마침 이모부가 보통학교 교감으로 재직하고 있어서 외할머니는 막내딸에게 글공부도 시키고 도시 맛이라도 접하게 해주고 싶어, 언니에게 청을 한 것이다.

 

 두 해가 지나서 38도선 이북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공산 치하가 되었고, 일제시대에 부역을 한 사람들은 모두 인민재판을 받아야 했다. 일제 강점기에 보통학교 교감을 한 어머니의 이모부도 재판을 피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당 고위 간부가 학교 제자라 눈감아 주었지만, 언제까지 무사할지 모를 일이었다.

 

북한 점령군이던 소련군이 1948년 12월에 시베리아로 철수하며 미군도 남한으로부터 철수하라고 요구하며 정치적 공세를 펼친다. 1950년 정초에 전쟁이 터질 거라는 소문이 흉흉하게 돌았다.

 

 벌써부터 북한의 민족주의자, 종교인, 교육자, 지주, 기업가, 기술자들은 철저히 숙청을 하고 있을 때라 이모부 가족들도 몰래 피난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모할머니는 “오늘 밤 가족 모두 남한으로 피난 간다. 너도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혹시 가기 싫으면 지금 보따리를 싸서 연변으로 돌아가라. 만약 혼자 이곳에 있다가는 공산당원에게 잡혀가 곤욕을 치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갑자기 혼자서 연변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너무 두려웠다. “그럼, 피난 갔다가 언제 돌아오는 거예요?”라고 물으니, “빠르면 몇 달이고, 늦어도 일 년 안에는 돌아올 것 같다”는 말에 길을 따라 나선다.

 

그때 이모할머니가 어머니를 데리고 피난을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뒤 이모할머니는 평생 동안 어머니를 친 딸처럼 보살펴 주었다. 그렇게 회령을 떠난 어머니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실향민들에게 고향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데, 어머니 주위에도 고향 사람들이 많았다. 함경도 말은 좀 투박하면서도 억센 느낌을 주어서 뜻을 잘 모르면 무슨 시비를 거는 듯한데, 그런 인상을 받는 것은 중국말과 비슷한 음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함경북도에서는 할아버지를 ‘아바니’ 또는 ‘큰 아바이’라 한다. 고모부, 이모부, 외삼촌은 모두 ‘맏아바니’ 또는 ‘몯아바니’라 한다. 남자의 경우 삼촌은 ‘아즈 바니’라 하고 여자의 경우 고모, 이모, 숙모는 ‘아재’라 한다. 부계와 모계의 구별이 없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 위냐 손 아래냐에 따라 호칭이 달라진다.

 

 흔히 쓰는 방언으로 가메치(누룽지), 안깐이(아낙), 동삼(겨울), 겡게(감자), 아지(나뭇가지)등이 있고, 러시아 방언이 뿌리내린 비지께(성냥), 마선(재봉틀), 거르마니(호주머니) 따위가 있다.

 

일제하 식민지 백성들의 애절한 삶을 기록한 이용악, 윤동주, 이태준의 문학 작품 속에서 함경도의 옛 방언을 만날 수 있다. “내 밥우 먹습꾸마.”라든가, “무스 거 하암둥? 일으 하기 입소. 자! 인차 집 우루가기오.”라는 글이 나온다. “일으 거 하갯는데 버뜩 대 못 들구서, 이래시문 둏을까 더래시문 둏을까 매삼질한단 말이오(일을 하려는데 버쩍 대들지 못하고, 이러면 좋을까 저러면 좋을까 안절부절못한단 말이오)”라든가, “어딜 떠 못 나구 영게서 한 뉠 살았디(어디로 못 떠나고 여기서 한평생을 살았지.)”라는 글도 보인다.

 

함경도하면 백두산과 그 언저리에서 펼쳐진 파란만장했던 민족사를 떠올리게 된다. 오래된 이야기다.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후 지금의 함경도는 여진족의 차지가 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몽고의 내침 이후, 여진족을 몰아내며 고려의 많은 유이민들이 함경도 땅으로 옮겨가 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고려 말, 조선 초기에는 두만강 유역의 함경도와 두만강 너머에 꽤 많은 고려인이 살았다.

 

용비어천가에는 그 무렵 선인들의 자취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 이안사가 전북 전주를 떠나 함남 원산 부근을 거쳐 정착한 오동(斡東)은 지금의 중국 길림성 훈춘시 경신진이란 곳이다. “두만강을 따라 펼쳐진 넓고 비옥한 평원, 그곳을 아름답게 수놓은 여덟 개의 호수와 러시아를 국경으로 한 길게 뻗은 산줄기에 목조(이안사의 호)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의 여기저기를 훑어보면, 세종대왕이 왜 그토록 함경도 땅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그곳이 고구려의 옛 땅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선조가 조선 창업의 터를 닦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2014년에 방영된 KBS 사극 '정도전'에서 이성계(유동근)가 친위 사병들을 이끌고 나가며 외친다. "내레 한마디만 하갔어. 둑디 말라우!" 이성계가 걸쭉한 함경도 말투를 쓰자 시청자들은 낯설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성계는 당시 변방이었던 함경도 사람이어서 사투리를 쓰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제작진의 설명이었다.

 

정통 TV 사극에서 주연급 배우가 사투리, 그것도 함경도 사투리를 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지만, 덕분인지 평균 시청률이 15.8%로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해 화제가 됐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일 년에 한 번 열리던 <회령군민회>라는 모임에 참석하였다. 비원이나 창덕궁 같은 고궁에서 열렸는데, 회령에서 온 실향민들이 모여 도시락도 먹고 술래잡기, 보물찾기 등도 해 상품을 받은 기억이 있다.  

 

어른들의 함경도 사투리 속에서 “아재, 즉금 무스 거 하오?”는 내가 그나마 알아듣는 말이었다. 꼭 그런 모임에는 흥에 겨워 노래를 불러 대는 이가 있기 마련이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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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4
꺼벙아, 좋아했는데 잘 안되더라

 

 우리 가족에게 ‘꺼벙이’라는 반려견이 있었다. 딸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 아르바이트를 갔다가 작은 요크셔테리어를 안고 왔다. 일하는 곳에서 “강아지를 너무 예뻐하니까 키워 보라고 주었다”고 한다. 당시 우리 부부는 아직 이민 정착도 제대로 못하고, 가게를 맞교대해야 하는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딸아이에게 “지금은 강아지를 돌볼 여력이 없으니, 다시 돌려주자”라고 타일렀다. 달래고 윽박지르고를 여러번 해도 답이 안 나오자 아내가 중재 안을 내놨다. “이왕 가져왔으니 며칠만 길러 보자”는 거다. 나도 딸이 울고 불고 힘들어하는 모습이 애처로워 승락했고 결국 ‘꺼벙이’는 10여 년을 우리 가족과 함께 살게 된다.

 딸은 지극 정성으로 똥오줌, 먹이 주기, 목욕, 산책을 도맡아 했고 꺼벙이는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다. 하물며 잠을 잘 때도 침대에서 끼고 잘 정도였다. 꺼벙이는 아내와 아들과는 비교적 사이가 좋았는데, 유독 나와는 사이가 안 좋았다. 자기를 처음 데리고 온 날, 내가 펄쩍 뛰면서 반대한 것을 함께 사는 내내 기억하는 듯했다. 몇 달이 지나서 안 것이지만, 꺼벙이는 베지테리언이어서 채식 사료만 먹었고 아토피성 피부염이 있어서 냄새가 심했다. 만약 내가 이 사실을 알면 트집 잡아 강아지를 돌려보낼까 싶어, 딸과 아내가 숨긴 것이다.

 성격도 까탈스러워 작은 소리에도 신경질적으로 짖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 손님들이 올 경우는 미리 꺼벙이를 방에 가두어야 만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면 딸과 나는 자주 다퉜고, 서로 속이 상했다. 몸에 장애가 있어 민감한 것으로만 알았던 꺼벙이는 사실 정신적 장애도 있었다. 동물병원 닥터에게 “자주 신경질적으로 짖는다”고 하니까, 그런 증상은 “어렸을 때 구박을 받거나 상처 받은 기억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 주인에게 “혹시 그런 일이 있었냐”라고 물으니, “자기네도 그 전 주인에게서 가져올 때 비슷한 사연을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상처를 준 사람이 중년의 남자였다는 것도 알아냈다. 그 뒤부터 나는 속으로 ‘저 놈이 그 상처 받은 사람을 나라고 생각하는구나’ 하는 짐작을 했다. 

 세월이 지나 딸이 교환 학생으로 한국을 몇 번 다녀오는데, 그때마다 꺼벙이 돌보기는 아내의 몫이었다. 그러다가 몇 년 후, 딸이 아예 한국으로 결혼을 해 가버린다. 딸이 없어지자, 꺼벙이는 배지테리언, 아토피성 피부염, 예민성 신경 질환에다가 심한 우울증까지 걸린다.

 강아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아내가 아무리 잘해주어도 딸만큼 하겠나” 싶어 나도 안타까웠다. 더 큰 문제는 아내가 오랫동안 한국을 다녀올 경우였다. 아들마저 대학 다니느라 워털루에 가 있었기에 집에는 꺼벙이와 나만 있는 경우가 많았다. 피부염이 심해 약도 발라줘야 하고 산책도 시켜야 했는데 그때마다 도망가거나, 으르렁거렸다. 냄새도 심해 목욕도 2주일마다 시켜줘야 하는데 걱정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들이 2주일에 한 번씩 집으로 와, 약을 발라 주고 산책과 목욕을 시켜야만 했다. 그런 과정은 한국에 외손녀가 생기면서 더욱 잦아진다.

 

 꺼벙이가 죽은 날은 토요일이다. 아마 우리가 키운 지 10여 년쯤 되었으니, 사람으로 치면 80세쯤 된 나이였기에 늙고 힘이 없었다. 아내는 다음날 한국에 가야 돼 짐을 싸며, “꺼벙이가 내가 없는 동안 어떻게 지내지?”하는 걱정을 했다. 꺼방이도 오래 함께 살다 보니 눈치를 챈 듯, 그날따라 불안해 보였다. 그러던 중 우리 집 밖을 산책하던 어떤 강아지의 소리를 듣더니 목이 터져라 짖어대기 시작했다. 한 10여 분간을 짖어대어 아내가 “저러다 숨 넘어가겠네” 했는데 말이 씨가 됐는지, 갑자기 쌕쌕거리며 숨도 못 쉬고 소리도 지르지 못하는 것이다. 말 못하는 동물이었지만, 눈동자와 온 몸으로 고통을 토해내었다. 마침 연휴의 토요일이어서 동물병원도 일찍 문을 닫은 상태였다. 여러 곳에 연락을 하고 부산을 떤 후, 가까스로 오후 늦게 병원에 갔다. 거의 다 죽어가던 꺼벙이가 산소호흡기를 부착해주니 신기하게도 의식을 찾았다. 의사 선생은 “지금은 의식을 다시 찾았지만,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라며 아쉽겠지만 그만 보내 주라는 것이다. 입원을 시켜 생명 연장을 할 수도 있지만, 몇 주 정도 의식 없이 숨만 붙어있는 상태일 테니 의미가 없다는 의견이다.

 병원 밖을 나온 아내와 아들, 나는 아무 말없이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긴 침묵 끝에, 아들이 눈물을 흘리며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며 먼저 입을 뗐다. 아내는 다음날 한국으로, 아들은 마침 엄마를 배웅하러 온 것이라 학교로 돌아가야 하고, 나 또한 앞으로 혼자 가게를 봐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너무 슬프고 힘든 상황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와 나는 선친이 돌아가셨을 때도 그렇게 슬피 운 적이 없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해가 완전히 떨어진 뒤에나 우리는 꺼벙이를 보냈다.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서 성조가를 불러 세계의 주목을 받은 레디 가가(Lady Gaga)가 이번엔 자신의 반려견 때문에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영화 촬영으로 파리에 가 있는 동안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에 두고 간, 두 프렌치 불도그(French bulldogs), 코지(Koji)와 구스타프(Gustav)가 총까지 들고 위협을 한 괴한들 한테 납치된 것이다. “납치당한 반려견 행방을 아는 사람한테 불문곡직하고 50만 달러를 주겠다”고 선언했다는데, 이를 두고 호사가들이 입방정을 떤다. “입맛 다실 정도의 금액이 아니니, 통 크게 200만 달러쯤은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 됐던 다행히 두 마리 모두 무사히 돌아왔지만, 돌아오는 과정이 미스터리투성이어서 앞으로 유사 모방 범죄가 많아질까 염려된다. 레이디 가가의 반려견 생환 기사를 보며 무지개다리를 건넌 ‘꺼벙이’가 생각났다. “꺼벙아! 아저씨도 너 좋아했는데, 잘 안되더라.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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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5
‘왈가닥 루시’ 보러 가요

 

 조금 이른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올 가을 경에는 여행을 다닐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미리 이런 상상을 해본다. 여행이라고 하지만, 아직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를 가는 것은 좀 부담스럽다. 그래서 미국 버펄로(Buffalo) 옆에 있는 제임스타운(Jamestown)이라는 마을을 가려 한다. 성질 급하신 분들은 벌써 구글에서 제임스타운을 찾아보실텐데, 그러실 필요 없다. 아래 글에 가는 길과 즐길 장소를 자세히 설명할 테이니까.

 

07:50 오늘은 2021년 9월 27일 월요일, 새벽 공기가 상큼하고 맑은 날이다. 이번 여행은 아내의 직장 후배 부부와 함께 한다. 8시까지 집으로 오기로 해서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이 후배는 몇 달 전까지 암 투병을 해서 편도 3시간 정도의 여행이 좀 무리인 듯했지만, 건강도 많이 좋아졌다고 해, “사는 게 별 거냐? 이 정도 호사도 못하면 토론토에 왜 이민 왔냐?”라고 부추겨 콧바람을 쐬러 간다.

 

 지난해 초여름에 그녀는 왼쪽 가슴에 팥죽 새알만한 딱딱한 덩어리가 생겨 병원을 찾았다. 두 달 전에 처음 발견되었지만, 통증도 없고 크기도 작아서 무시하고 지냈는데 크기가 점점 커졌다. MRI 검사를 한 결과 종괴(덩어리)가 있었고 육종암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육종암이란 뼈, 근육, 신경 등의 골격에 발생하는 암을 말한다. 흔히 알고 있는 암과 달리 몸의 골격을 구성하는 조직에서 발생해서 육종(Sarcoma)이라 구분한다고 한다. 이 암은 일반 암과 달리 외부와의 접촉이 불가능한 부위에 발생하므로 환경적인 요인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어서 아직도 정확한 원인을 모르는 희귀 암이다.

 

 두 달 정도의 약물치료를 하고 담당 의사가 “종양의 광범위한 절제가 필요해 갈비뼈를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종양의 악성도가 높지 않을 경우, 완치율이 90%라는 말에 왼쪽 갈비뼈 세대를 잘라내는 수술을 했는데, ‘뼈를 깎는 고통이란’ 뜻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며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웠다. 10월 경에 수술을 끝내고 6주 뒤부터 일상적인 걷기와 간단한 운동을 하며 계속해서 항암 치료를 받았고, 지난봄에 항암 치료를 마쳤다. 다행히 조기 발견했기에 결과가 좋았는데, 그러다 보니 그동안 어디 변변히 다닐 수도 없었다.

 

 아, 저기 차가 보인다. “안녕하세요? 언니, 날씨가 너무 좋아요?” 아내가 반갑게 그녀와 포옹을 한 후 차에 올랐다.

 

09:05 우리는 407 하이웨이를 타고 서쪽으로 가다가, 퀸엘리자베스웨이(QEW)로 빠져 15분 거리에 있는 스토니크릭(Stoney Creek)의 팀호튼스에 들러 커피와 간단한 요기를 했다. 점심 먹을 버펄로(Buffalo)에 있는 식당에 전화로 예약을 하고 화장실을 다녀와 차에 올랐다. 바로 포트에리(Fort Erie)로 갈 수도 있지만, 오랜만에 나이아가라 폭포도 한번 볼 겸 나이아가라로 향했다. 한국에서 손님이 올 때마다 갔기에 수십 번이나 간 곳이지만 오랜만에 오니 속이 뻥 뚫린다.

 

 그곳에서 폭포 상류를 따라 포트에리까지의 경치는 지역주민들이 추천하는 비경이다. 대부분 관광객들은 폭포 하류의 나이아가라온더레이크(Niagara-on-the-Lake) 쪽을 가다 보니 반대쪽 상류는 경험하기 쉽지 않다. 길을 따라 고풍스러운 저택들이 자리 잡고, 강 건너에 있는 섬, 강물에 비친 구름이 가슴을 한 옥타브 떨어트리게 만든다. 오랜만에 커플 사진도 찍고, 한참의 여유를 부리다가 피스브리지(Peace Bridge)를 건넜다.

 

 

11:20 미국 버펄로 검문소를 지나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올리브가든(Olive Garden)이라는 이태리 레스토랑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시내에도 지점이 있지만, 우리는 서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매킨리몰(Mckinley Mall) 지점을 찾았다. 주소는 3701 Mckinley Pkwy, Blasdell(+1 716-822-1275)이다. 점심 스페셜 메뉴인 수프, 샐러드, 갓 구운 빵과 파스타를 선택했다. 파스타 종류가 다양해 이것저것 시켜 나눠 먹었는데 양도 푸짐하고 맛도 있었다. 이곳은 버팔로 맛집으로 유명한데, 4인이 팁을 포함해서 $100 정도 나왔다. 와인을 곁들여도 $30 정도만 추가하면 될 정도로 가성비가 좋다. 하지만 점심시간에는 자리가 없어 적어도 2시간 전에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이제 이곳에서 40분만 더 가면 목적지가 나온다.

 

13:50 목적지인 제임스타운 <국립 코미디센터(National Comedy Center)>에 도착했다. 주소는 203 W 2nd St, Jamestown, NY 14701 미국이다. 제임스타운(Jamestown)은 인구 3만 명의 작은 도시인데, 이곳에 5천만 달러 규모의 코미디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이 생기게 된 것은 이곳이 미국 '코미디의 여왕'인 여배우 루실 볼((Lucille Ball/1911∼1989)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출연한 ‘왈가닥 루시(I Love Lucy)’라는 시트콤은 1950년대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무려 68%에 달하는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총 179편의 에피소드가 방송된 후 왈가닥 루시는 1960년대까지도 방영되었고 지금도 미국뿐 아니라 다른 국가에서도 신디케이트로 재방영되고 있다. 방영기간 동안 5개의 에미상을 수상했는데, 1970년대에 한국에서도 방영되었다.

 

 

 2018년에 개관된 박물관은 코미디를 하나의 예술 장르로 기념하기 위해 배우들의 마음을 모아 만든 곳이다. 미국 코미디물의 역사와 자료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유명 코미디언의 대사를 흉내 내볼 수 있는 '코미디 가라오케' 등 음향·영상 체험 시설도 있고, 조지 칼린, 채리 채플린 등 세상을 떠난 유명 코미디언들이 남긴 유품과 비디오물을 둘러볼 수 있는 전시공간도 있다. 수요일과 목요일은 정기 휴관이고 입장료는 성인 $30, 시니어 $27이다. 여유롭게 관람하면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는데, 웹 사이트를 찾아보면 가끔 스페셜 이벤트를 볼 수 있다.

 

15:20 돌아오는 길에 버팔로에서 주유를 했다. 미국이 기름값이 싸서 국경 넘을 때는 기름을 채운다. 다리를 건너서 포트에리로 쪽 406 하이웨이를 타고 세인트캐서린스(St. Catharines)를 가로질러, 다시 퀸엘리자베스웨이(QEW)를 타면 왔던 길이 아니라 지루하지 않다. 제임스 타운에서 쉬지 않고 토론토의 노스욕까지 오면 3시간 15분 정도 걸리는데, 우리는 벌링턴 비치(Burlington Beach) 교차로에서 나와 화장실도 들를 겸 차를 한잔하고 다시 407 하이웨이를 타고 집으로 왔다. 차 안에는 권진원의 <살다 보면>이 흘러나왔다. 살다 보면 하루하루 힘든 일이 너무도 많아/ 가끔 혼자서 훌쩍 떠났으면 좋겠네/ 수많은 근심 걱정 멀리 던져 버리고/ 언제나 자유롭게 아름답게 그렇게”

 

20:10 “피곤하지 않아?” “아니요. 하늘이 날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오늘, 하루가 소중한 것을 느꼈어요.” 그녀가 아내와 포옹을 하고 다시 차에 오른다. 오늘 하루 종일 운전을 한, 그에게 “오늘 수고 많이 하셨어요” 했더니, “다음 번엔 하룻밤 자고 오는 코스로 잡죠”하며 차창을 올린다. 투병하는 아내를 보살피느라 지친 그의 모습 속에 부부의 정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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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hyunsoo
황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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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8
‘내일마저 얘기해요’

 

 1970~80년대에 청소년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 라디오는 ‘벗’이었다. 요즘은 머리맡에 스마트폰을 두고 자지만, 그때는 손바닥만한 라디오를 끼고 잤다. 어머니한테 잔소리라도 들을까 싶어 이불을 뒤집어 쓰고 라디오를 들었던 추억이 있는 이들이 꽤 있다.

 자기만의 사연을 엽서에 보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사연에 슬퍼하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DJ가 내 엽서를 뽑아 주기라도 하면 대학 합격한 것만큼이나 기뻤고, 좋아하는 팝송이라도 나오면 카세트 공 테이프를 준비했다가 녹음 버튼을 눌렀다. 우리집 창고 어디엔 아쉬워 버리지 못하는 카세트테이프가 한묶음 있는데 그 대부분이 아내가 녹음한 것이다.

 방송국에서는 연말이면 예쁜 엽서를 뽑아 전시를 하기도 했고, 연말 가요 순위를 결정할 때도 엽서 투표 결과가 중요했다. 공부보다는 친구와의 재미가 우선했고,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흘러나오는 음악으로 위로받던 그 시절이었다. 그중에서도 <MBC 별이 빛나는 밤에> 시그널 음악은 아직도 눈을 감으면 신기 생생하게 재생된다.

 “지으릉~ 찌릉~ 찌이으~릉…” 이렇게 시작하는 프랑크 푸르셀(Frank Pourcel) 오케스트라의 메르쉬 쉐리(Merci Cherie)는 우리에게 더 없는 달콤함과 편안함을 주었다. 뉴에이지 음악이 생소하던 시절, <별이 빛나는 밤에> 시그널을 연주하는 1분 동안은 꿈의 음악여행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원래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프로그램 제목은 문화방송 신입사원이었던 장명호가 1969년에 지은 것으로 당시 상금 2만원을 걸은 사내 공모에 당선되었다고 한다. 그는 라디오 음악 피디를 거쳐 경영이사, MBC에드콤 사장을 지내는데, <별밤> 덕에 ‘별’을 달았다는 우스갯소리도 전해진다.

 MBC 라디오의 간판 프로그램인 <별이 빛나는 밤에>는 53년째 방송 중이다. 1969년에 시작으로 차인태, 이종환, 박원웅, 김기덕, 이수만 등을 거쳐 현재는 작가 김이나가 ‘별밤지기’를 맡고 있다. 이문세가 14대 디제이였던 1984∼95년의 <별밤> 청취율은 20%가 넘는다. 이문세에게 '밤의 문교부장관'이란 별명도 붙었을 정도였다.

 당시 이문세는 한 청취자가 ‘등대지기’라는 말에 창안하여 ‘별밤지기’라는 말을 만들고 <별이 빛나는 밤에>도 <별밤>으로 줄여 불렀다. 그는 생일 축하 사연이 나올 때면 별도의 축하곡을 만들어 직접 라이브로 불러 주기도 했는데, 그때 만든 곡이 2002년에 발매된 ‘추카해요’다.

 라디오는 신문이나 TV에 비해 사용자 참여 폭이 훨씬 컸던 매체였다. 현장성은 TV에 밀리고, 깊이는 인쇄 매체를 당하기 힘들었던 라디오는 엽서로 청취들과 소통하고 제작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요즘은 엽서로 사연을 보내는 청취자는 없다. 인터넷 게시판에 접속하거나 스마트폰 문자로 제작진과 직접 소통할 수 있으니, 번거롭게 수선을 안떨어도 된다.

 설레는 마음으로 엽서에 나의 사연을 적어보내던 시절은 기억조차 희미하다. 스마트폰으로 ‘좋아요’를 누르면 되는 그 편한 세상의 중심에 카카오톡이 있다. 작년 기준 카카오톡 하루 메시지 전송 건수는 110억 건을 넘었고 전 세계 약 5천149만 명이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다. 친구, 가족, 연인, 직장 동료에게 예전이라면 하지 않았을 말까지 모두 토해낸다.

 일대일은 물론이고, 수십 수백 명이 모인 단톡방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쏟아낸다. 편지는 벌써 잊은 지 오래고 긴 문장의 메일보다는 손 안에서 문자와 사진, 동영상, 음원을 주고받는다. 모르는 사람과도 채팅할 수 있는 ‘오픈 채팅’도 가능해졌다. 그러다 보니 라디오 같은 매체를 통해 수다를 떨거나 하소연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환경 속에서 라디오는 갈 길을 잃은 듯하다. 특히 53년의 나이를 먹은 <별밤> 같은 프로그램은 7080 세대들에게는 추억이자 소중한 문화유산이지만, 나이만큼 고민도 많은 듯하다.

 그동안 지켜왔던 청소년 프로그램이라는 정체성을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지,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어필해야 할지? 지금 10대인 청소년 청취자도 중요하고, <별밤>과 함께 나이가 들어버린 50~60대 청취자까지도 쉽게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별밤지기’를 하고 있는 김이나는 청취 대상을 기존의 젊은층에서 벗어나 1970~80년대 생들이 좋아할만한 추억의 선곡과 코너, 게스트들을 초대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변화는 평가가 엇갈리지만, 추억 팔이를 좋아하는 <별밤> 가족들은 환영하고 있다.

 사실 라디오는 아무 생각없이 틀었다가 은연중에 끌리는 음악 때문에 마음이 빼앗기게 되는 매력이 있다. 그래서 이야기와 공감에 목마른 청취자는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이제는 해외에서도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어플 ‘MBC 미니’를 통해 들을 수 있고, 사연도 보내고 듣고 싶은 노래를 신청할 수 있게 됐다. 제작진은 <별밤>의 매력을 잊지 못하는 해외동포의 이야기에도 귀 기울였으면 싶다.

 현재 ‘별밤지기’인 김이나는 언어의 마술사라는 평이 따라다니는 똑소리 나는 작사가다. 저작 등록곡 만 470편이 넘을 정도로 창의적이고 문학적 균형을 지녔다.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별밤>의 빛을 다시 찾아내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그녀가 짧고 굵게, 매일 밤 속삭이듯 ‘내일마저 얘기해요’ 라는 마지막 멘트는 많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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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hyunsoo
황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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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1
<아니 벌써>로 지난 ‘시간’ 엿보기

 

 어느 이민자가 이웃에서 초청한 파티에 참석했는데, 영어를 잘하지 못해 내내 불편했다. 어색하기도 하고 지루해서 집에 가고 싶어 ‘지금이 몇 시죠?’하며 옆 사람에게 물었다. “익스큐즈미, 왙 이즈 타임(What is time)?” 그랬더니, 그가 웃으며 “시간이 뭐냐고?. 저는 물리학자인네, 그건 철학자에게 물어보셔야죠?”했다고 한다.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에 참여한 패널이 주제의 무거움을 토로하며 한 말이다.

 많은 이들이 코비드19 때문에 어려움도 많이 겪고 있지만, 반면에 자신을 돌아보면서 깨닫게 된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는 듯하다.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산울림 밴드의 김창완도 그랬던 것인지? ‘하루를 열차 시간표처럼 쪼개 쓴다’는 그가 지난해 11월, 새 음반을 발표했다. ‘시간의 문을 열다’라는 부제가 붙은 이 음반은 김창완이 37년 만에 낸 솔로 앨범이다. “그동안 틈틈이 음악 작업은 계속해 왔고 불씨는 태우고 있었는데, 발심(發心)하는데 무려 37년이 걸렸다”라고 한다.

그는 친동생인 김창훈, 김창익과 1977년에 산울림을 결성해 <아니 벌써>로 데뷔했다. 그 뒤 <창문 넘어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산 할아버지> <개구쟁이> <어머니와 고등어>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2008년 막내 동생이 캐나다에서 사고로 떠난 뒤, 산울림 밴드는 해체되고 가수보다 배우나 디제이로의 활동을 많이 한다.

배우로 출연한 드라마와 영화만 70편이 넘고, 20년이 넘도록 SBS FM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의 디제이를 하고 있다. 물론 다시 결성한 김창완 밴드와 같이 여러 곡들도 발표했지만, 혼자 앨범은 이번이 두 번째다.

그가 새 앨범에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김창완은 살며 느꼈던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기록하려 했다. 물리학자나 철학자가 설명하기 어려운 답을 노래로 풀었다. 그의 <시간>이라는 곡에 속 마음이 잘 녹아 있다.

 

“시간은 화살처럼 앞으로 달려가거나/ 풍경처럼 한결같이 뒤로만 가는 아니야/ 앞으로 가고 뒤로도 가고 멈춰 있기도 한단다// 사랑을 위해서 사랑할 필요는 없어/ 그저 용감하게 발걸음을 떼기만 하면 // 잊지 마라 시간이 거꾸로 간다 해도/ 그렇게 후회해도/ 사랑했던 순간이 보석이라는 것을…”

 

이 노래는 기타 한 대에 반도네온(아코디언 비슷한 악기) 연주를 얹어 내레이션과 노래로 만든 곡이다. 말과 음률의 경계를 허물은 탓에 애초부터 크게 히트 칠 욕심으로 만든 곡은 아닌 듯하다. 5분이 넘는 시간 중에 3분 정도가 기도문 같은 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방송용으로는 적합하지 않고, 공연장이나 음원으로 들어야 제 맛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참고 듣고 있으면 삶의 순간을 책갈피처럼 나눈 느낌을 받고, 그의 노래가 늘 그렇듯 참 특이하고 새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이 노래에서 이때까지 들어본 적 없는 김창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솔직히 말해 그는 훌륭한 보컬리스트는 아니지만, 깔끔한 음색을 가졌다. “시간은 모든 것에 무관심했지만 추억을 부스러기로 남겼지”라는 지친 노인의 저음이다.

품격도 근엄도 없는, 그저 주름이 있는 예순여섯의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둥근 안경과 웃는 표정 없이 한결같은 부끄러움으로 이야기하지만, 헛되이 낭비한 세월의 모습이 아닌, 진솔함이 묻어 있다. ‘음악이란 인생을 담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김창완의 <시간>은 자신이 살아왔던 시간을 그린 것이다.

노래는 상상 속에서 이때까지 느꼈던 감각을 동원해 그 시대를 여행할 수 있다. “1977년에 당신은 무슨 일을 했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할 수 없지만, 산울림의 <아니 벌써>가 나왔을 때를 묻는다면 잡다한 기억들을 끄집어낼 수 있다. 그때 나는 제대를 해 복학을 했고, 절친인 임희택과 배낭 하나 짊어지고 부여 낙화암과 남해 상주해수욕장을 여행했다. 털털거리는 시외버스를 타고 시골길을 달렸다. 아마 그 시외버스 안에서는 <아니 벌써>가 흘러나오고 있었겠지.

 

 노래는 잊혔던 기억 창고를 열 수 있는 힘을 가졌다. 노래는 따로 시간을 투자하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삶의 배경 속에 흐른다. 내가 살아왔던 흔적 속에 묻어 있다가 그때의 노래를 들으면 숨어 있는 추억 부스러기를 찾아내는 듯하다. 마치, 김 양식장의 그물을 건져 올리면 해초가 얽혀 나오듯 자연스레 떠오는 것이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그리움에 옛 노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때를 대표하는 명곡들은 잊히지 않는다.

산울림 삼 형제의 록밴드가 <산 할아버지>라는 동요를 발표한 시절, 전두환이 대통령에 오르고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된다. 한국 프로 야구가 출범한다. <산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야간 통행금지’도 ‘프로 야구 개막’도 난 기억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김창완의 <시간> 속에서 나의 시간도 찾을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형제들 없이 혼자 노래하는 쓸쓸한 김창완의 모습 속에서 노인이 되어 버린 나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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