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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명한 하늘을 배경으로 맑고 신선한 바람이 지나간다. 울타리엔 작은 새들이 넘나들고, 잔디밭에는 외롭게 작은 토끼 한 마리가 앉아있다. 계절의 질서는 엄격하다. 앞선 계절을 물리거나 따라잡을 수 없는 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감탄한다. 찬이슬이 내린 다음에 서리가 내리지 않는가?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든 갈증 나던 여름이 사라지고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세월은 너무 빨라 뒤를 미처 돌아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릴 때도, 어느덧 뜰에 피어있는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며 높고 맑은 가을하늘을 보면서 “아! 가을이 왔구나”하고 느끼는 순간 나는 어느덧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게 된다.


 집주변이 숲이고 가을꽃이 지천이다. 그런데, 나는 전과 달리 꽃 그 자체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려니와, 그 생명의 신비를 보면서 더욱 꽃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느껴지게 된 것은 근래에 들어서라고 할 수 있겠다. 꽃은 변모하는 자연을 실감케 해주고, 우리의 메마른 정서에 윤활유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


 싹이 돋고 꽃망울이 터지고, 마침내 탐스러운 꽃이 하늘을 바라보고 만개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생명은 아름다운 것을 실감케 된다. 더욱이 꽃은 동물과 달리, 고독과 침묵 속에서 그 생명력을 키워나가다가 그 마지막 순간 환희의 목소리처럼, 그 “생명력의 본질”인 꽃을 피워내는 것이다. 


 이 얼마나 신비하고 절묘한 사건인가. 꽃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동감할 수 있는 경이로운 사건이다. 그래서 꽃은 우리에게 더욱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우리집 뜰에는 초여름부터 계속해서 피고 지기를 시작한 2 그루의 무궁화가 있다. 꽃은 보통 2-3일간 피어있기도 하는데 이른 새벽에 꽃이 새로 피었다가 오후에는 오므라들기 시작하고 해질 무렵에는 꽃이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날마다 새로운 꽃이 피어 신선한 모습을 자랑하며 추위에도 비교적 강해 10월 하순까지도 개화한다. 어느 날부터 무궁화를 시샘하듯 빨간색, 분홍색, 하얀색으로 활짝 핀 코스모스가 무리지어 가을이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듯 한들거리고 있다. 한없이 투명한 가을 하늘, 무궁화, 코스모스, 더욱 가까워진 산들, 깊게 흐르는 강물, 귀뚜라미 소리가 가을을 알리고 있다.


 코스모스는 여름의 불볕더위가 사그라질 무렵에 피기 시작하는데, 잠자리와 더불어 서늘한 가을의 전령으로 환영받기도 한다. 이름있는 꽃들은 대개 전설이나 설화가 있게 마련이지만, 코스모스는 그렇지 못하다. 다만 신이 가장 먼저 습작으로 만든 꽃이 바로 코스모스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가냘프고 어쩐지 흡족하지 못해 신이 이렇게 저렇게 만들다 보니 종류도 다양해진 듯하다. 그러나 코스모스의 청초한 아름다움은 쓸쓸히 가을 길을 가는 나그네를 반기는 꽃이다.


 가을바람에는 이상한 마력이 있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설렁설렁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어디론지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그것은 어쩌면 바람 탓인지도 모른다. 해마다 이맘때면 연중행사처럼 나는 여행을 떠나거나, 먼 곳에서 찾아오는 친지나 벗들을 맞이한다. 불교에서는 옷깃 한 번 스치는 것도 소중한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의 인연은 매우 소중하다.


 우리가 김희용씨 내외를 만난 것은 몇 해 전 토론토에 살고 있는 그의 친구 오 선생을 찾아왔을 때였다. 금년에도 친구를 찾아 먼 곳을 찾아왔다. 대한민국을 지키는 한 엔지니어가 가을나들이로 북미로 온 것이다. 오랜만에 모국소식도 전해듣고,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북핵, 미사일 문제는 대한민국에서는 해외에 살고 있는 동포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다.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우리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귀국했다.


 인연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사람을 맺어주는 필연적 우주질서라고 한다. 우리의 만남과 헤어짐이 순간적으로 끝난다할지라도 그것은 끝남이 아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있다 해도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포개주는 것은 바로 정지됐던 시간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인연이란 사람의 마음을 동시에 불 밝히는 하나의 등불이 되어준다. 


 산과 들이 가을에 잠겨있고, 하늘이 높푸르다. 마음은 가라앉고 햇빛은 부시다.


 연륜이 쌓여야 인생을 말할 수 있듯 계절도 가을이 되어서야 깊은 맛을 보인다. 여름이나 겨울처럼 길거나 강렬하지 않고, 그저 스쳐지나가듯 짧게 머물다 가는 초가을, 그래서 더 아쉽고 슬프고 찬란하게 빛나는 가을, 그 소중한 계절,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우리는 충분히 인생을 즐기고 있는가. (20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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