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에 풍랑이 그칠 날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한일관계는 지난 반세기 동안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착실히 발전되어 왔다는 것은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 금세기에 들어 일본의 국정교과서와 외교청서 및 방위백서 등에 독도 영유권 주장,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된 피해자 보상문제, 위안부 문제, 일본 대마도 불상의 반환문제 등이 한일 간의 외교 현안으로 남아 있다.
문제는 한일 양국이 상호 소통과 협력이 안 되면 두 나라 모두 손해를 보는 관계라는 점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이 상징하듯 광복 이후 우리의 대일 인식은 이중적이었다. 일본은 우리에게 청산의 대상이자, 냉전체제에서 살아남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없어서는 안될 ‘준동맹국’이었다.
미국과의 동맹관계 및 자유무역 시장경제 체제에 사활적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한일 양국은 전통적으로 안보와 경제분야에서 국제 정세의 불투명성이 증가할 때 상호협력을 강화해왔다.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한일관계가 이완됐다고 하지만, 경제와 안보 분야에서 양국 간에 원활한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면 쌍방이 손해를 보는 관계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의 기치 아래 보호무역주의와 고립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국제 정치-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졌다. 이뿐만 아니라 국제경제의 침체와 불안정 요인, 북한의 거듭되는 핵-미사일 도발, 사드 배치를 둘러싼 한중관계의 경색 등을 감안한다면, 2017년은 그 어느 때보다 한일 양국이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최소화하고 전략적 협력을 강화해야 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지정학의 부활’이 회자되고 현실주의 국제정치관이 힘을 얻고 있는 동아시아 국제 정세는 우리 외교가 국익 극대화라는 전략적 관점에서 한일관계를 재검토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50여 년간의 한일관계가 식민지배의 가해자와 피해자, 혹은 선진국과 개도국이라는 수직적인 특수 관계의 성격이 강했다면, 새로운 한일관계는 수평적인 보통의 국가관계를 특징으로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부상을 배경으로 역내 국제관계가 빠르게 재편되는 상황에서 한일 양국이 상대방의 전략적 가치를 느끼지 못하면 협력하기 어려운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중 양국이 주도하는 동아시아의 질서가 역내 중소국가들에게 불편한 것이 되지 않도록 견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일 양국의 협력이 불가피하다.
또한 북한 핵-미사일 도발로 동북아시아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한일 간 국가 안보를 포함한 다방면에서 협력이 필요하며, 한일 양국의 공조로 북한 핵-미사일 해결과 한반도 비핵화를 이룬다면 국방,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그 힘이 발휘될 것이며, 나아가 과거사와 영토 분쟁을 뛰어넘어 오랜 갈등까지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협력은 단순히 북한 도발을 대비하는 차원일 뿐 아니라 중국의 군사력 확장에 대비하는 차원에서도 필요하다. 즉, 중국이 한일 양국의 생명선인 해상수송로가 지나가는 남중국해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군사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는데 대해 공동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라는 지역적이고 다자적인 관점에서 일본을 제약 요인이 아니라 기회 요인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어떠한 접근이 필요한지, 과거사 프레임에 속박되지 않는 한일관계를 어떻게 구축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한 때이다.
한국인은 일본의 군사대국화와 안보역활 확대에는 우려를 표하면서도, 동북아 질서유지를 위한 한일간-군사안보협력을 지지했다. 결국 한국과 일본은 동일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북핵문제의 해결, 중국 경제에의 과도한 의존에 따른 위험성 회피, 미국에의 과도한 안보 의존에 따른 위험성 회피 등 여러 면에서 한일 양국은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도 많이 바뀌었다. 한국은 그동안 일본의 역사 인식에는 비판적이었지만, 일본은 한국보다 선진국이며 경제발전에 도움을 준 나라, 아직도 배울 것이 많이 있는 나라라는 인식을 가졌다. 그런데 한국의 국력이 신장되고, 국제적 위상이 올라가면서 일본을 무시하는 태도가 생겨났다. 더불어 일본의 역사인식에 대해서도 국제적 추세와 인류보편적 인권 개념의 프리즘을 통해 더욱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모두 ‘향수’를 버려야 그나마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일본은 과거에 대한 향수를 버려야 한다. 일본의 자랑은 제2차 세계대전 전 제국주의 시절이 아니다. 종전 이후의 눈부신 성장과 국제적 기여를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그러면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에 대한 사죄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그들의 치욕적인 만행을 경험했던 우리 세대들은 피해자들로서 결코 일본인들을 좋아할 수 없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좋아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고 지금 일본의 모든 것을 미워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시대가 왔다. 한국도 이제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던 그런 허약한 나라가 아니다. 우리도 좀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영토, 역사 문제 등은 끝까지 추궁하되, 일본이 결정할 수 있는 헌법 개정이나 집단자위권 확보 등은 인정해줘야 한다. 한일관계는 예전에 가깝고도 멀다고 했다. 그걸 지금까지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로 만들려고 무진 애를 써왔으나 어렵다는 게 드러났다. 이제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나라를 지향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20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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