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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자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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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자

경기도 여주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기도 광수중학교 근무, 1992년 캐나다 이민, 캐나다문인협회 수필 부문 입상, 2006년 해외동포문학상, 작품집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만 또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나이만큼 행복한 여자>, <밀리언 달러 티켓 나도 한장>,<행복이라는 이름의 여행>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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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한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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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5
참았던 눈물(하)

 

 

(지난 호에 이어)
 아이들 덕분에 매상이 조금씩 올라와 남편이 떠나고 1년 후 가게를 개인매물로 신문에 올렸다. 한 두 사람 전화가 오긴 했으나 살려는 사람은 없었다. 요즈음은 한국 사람들이 점차 가게를 떠나가고 있는 추세여서 외국 사람들 쪽을 찾아야 한다며 중국 사람을 통해 중국마켓에 올렸더니 중국 사람도 아닌데 왜 매물을 시장에 올렸느냐며 항의하는 사람도 있더라고 했다.


 그러는 사이 난 과연 가게를 팔 수 있을까, 염려스러울 때마다 딸에게 그런 류의 얘기를 하면, 걱정하지 말라며 권리금을 못 받으면, 물건 값만 받고 넘기면 되고, 정 안 되면 문을 닫고 나오는 방안도 생각해 보면 되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난 그때마다 딸아이가 고맙고 참 든든했다. 


 개인매물로 내놓는 것 가지고는 안 되겠다 싶어 부동산을 통해 정식 리스팅에 올리고 보니 외국 사람들이 한 두 사람 관심을 갖고 보러 오기도 했다. 가게를 마켓 리스팅에 올리고 1달이 넘어갈 즈음 오퍼가 들어 왔다. 부동산 중개인을 통해 그 소식을 접하는 순간 반가우면서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과연 이 오퍼가 성사될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기다려야 했다. 


 가게를 사겠다는 사람은 시리아 사람으로 캐나다에 온 지는 7개월이 되었다고 했다. 남자는 나이가 60 가까이 되어 보이는데 부인은 30대 중반 쯤으로 세 살 된 딸을 데리고 남편의 친구라는 사람과 같이 왔다. 


 그런 그들이 가게를 사겠다고 오퍼를 넣었다는데 남자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데 친구가 도와준다고 했다. 정식으로 계약서에 사인을 했는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들이 변호사 선임을 하고 우리와 같이 조건을 조율해 가는 과정에서 건물주가 너무 까다롭게 한다며 우리 보고 그들한테 얘기를 좀 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큰 딸이 건물주한테 부탁하는 식의 메일을 보냈는데 어느 날 건물주를 볼 수 있었다. 난 이때다 싶어 손까지 덥석 잡으며 제발 부탁한다고, 갑자기 남편을 잃고 1년을 너무 힘들게 버텨왔다며 제발 도와달라고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바이어가 마음이 바뀌면 어쩌나 그게 더 신경이 쓰였다. 


 무엇이든 임자가 따로 있다더니 그들이 우리 가게 주인이 되려고 했는지 몇 번씩 건물주와 조건을 맞추어 가는 것 같더니, 드디어 변호사 사무실에 가서 잔금을 주고받는 날짜까지 나와 있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돌아서며 나와 큰 딸은 한시름 놓았다며 우선 커피숍으로 갔다.


 커피를 놓고 자리에 앉으며 큰 딸한테 그 동안 “애 많이 썼다며 고맙다고 했더니, 새 주인이 장사를 잘 할 수 있도록 트레이닝 시켜주고,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주고, 가게 열쇠를 넘겨줄 때까지는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딸을 보니, 남편을 보내고 딸들이 곁에 없었다면 나 혼자 감당할 수 있었을까 싶으니 다시 또 딸들이 참 고마웠다. 드디어 가게를 팔고 사겠다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가게로 돌아오니 그제야 안도의 눈물, 한고비 넘겼나 싶으니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우린 딸들과 같이 아빠가 우리를 돕고 있다며 아빠가 해야 할 일, 내와 딸들에게 지워줬던 짐을, 이젠 내려놓을 수 있으려나 정말 남편이 돕기라도 하는 듯 남편에게 고맙고, 그 순간 남편이 참 보고 싶었다. 


 슬퍼할 겨를도, 편하게 쉴 수도 없이 그야말로 정신 없이 1년이 흘러갔다. 가게로 돌아와 그런 저런 상념에 젖어 있는 동안 밖엔 비가 세차게 퍼붓기 시작했다. 낮엔 그리도 덥더니 가게에서 일을 하며 눈시울만 붉히고 있었는데 어느새 비가 그쳤나 보다.


 손님이 나가더니 무지개가 떴다며 나와서 보라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언젠가 나이아가라에 갔을 때 봤던 그 무지개가 옆집 가게 위에 떠 있었다. 난 다시 남편이 그 모든 일을 도와주고, 우리에게 격려하는 차원에서 ‘무지개 선물’까지 했다며 사진을 찍어 딸들에게 보내줬다. 


 왜 아니겠나. 딸들도 엄마 마음과 같겠지, 우린 서로를 격려했다. 그날 가게 문을 닫고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데, 무거운 짐을 딸들에게 안겨주지 않아도 되네 싶으니 짓눌렸던 눈물이 쏟아졌다. 언제 죽어도 좋은 마음의 편안한 눈물이 그냥 흘렀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hansoonja
한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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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9
참았던 눈물(상)

 

 

 남편이 갑자기 사망을 하고 보니, 사람이 이렇게 쉽게도 ‘숨을 거둘 수’가 있는 것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음 순간 ‘슬프다’는 생각보다는 가게 문을 닫을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하지 그것이 우선 무겁게 다가왔다.


 남편을 땅에 묻고 오던 날도 가게 문을 열었다. 장례를 치르고 식구들과 식사를 하고는 난 가게로 나갔다. 하루 쉬라는 딸들의 권유에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내 현실을 빨리, 바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도 그래야만 했다.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4살배기 손녀가 “할머니 저희 집으로 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4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애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나 하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신기하고 고맙기도 했다. 옆에 앉아 있던 큰 딸이 “엄마, 혼자 집으로 갈 수 있겠어, 저희 집으로 가요”라고 했다.


하지만 난 그리 되면 우선 내 잠자리가 불편하기도 했다. 남편과 같이 살던, 남편이 침대에 누워 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생생해서 조금은 섬뜩하기도, 무서운 마음이 없지도 않았지만 내가 빨리 적응을 해야 했다. 


 내가 남편을 따라 죽을 수도, 이 현실을 회피할 수도 없는데, 잠시 모면하고자 딸네 집으로 간다면 내 마음이 그만큼 더 힘들어질 것 같았다. 남편을 졸지에 보내고, 내가 우선해야 할 것은, ‘집과 가게’에서 내 ‘마음이 뜨지’ 않도록 그 마음을 바로 다스리고 잡아 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그랬기에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가게에 나가서 몇 시간 일을 하는 동안에도 가급적이면 남편이 사망했다는 것은 물론이요, 남편 생각조차도 잠시 뒤로 미루고 싶었다. 그래서 손님들에게도 남편의 사망을 얘기하지 않았고, 딸들에게도 혹시 누가 물으면 한국에 나갔다고 둘러대라고 했다. 


그러니 일을 하는 동안 울 수도, 눈을 붉혀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다 해도 순간순간 눈가에 내비치는 눈물까지야 어찌 막을 수 있었을까. 힘겹게 몇 시간 일을 하고 가게 문을 닫았다.


 드디어 차에 올라타면서, ‘이제 나 울어도 될까? 아니, 엉엉 목 놓아 울어볼까’ 했다. 한 번 앓지도 않던 사람이 불과 며칠 사이에 갑자기 사망을 하고, 남편과 나는 헬퍼 한 번을 쓰지 않고, 아니 못하고 ‘생계’를 유지해 왔는데, 이제 온전히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몫, 짐이네 싶으니 눈물을 흘리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정신을 차려 지금 처해진 현실을 살아내야 했다. 그런 무게 감이 우선 다가왔기에 슬퍼할 겨를도 없어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난 남편을 그렇게 보내고 이젠 남편과 같이 키웠던 개 세 마리와 어디든 ‘거취’를 옮겨야 했다. 나 혼자가 아닌 달린 식솔(견공 3)들이 있으니 어디로 가야 할지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 문제는 좀 미룬다 해도, 가게를 나 혼자 꾸려갈 수가 없으니, 그 다음날부터 작은 사위가 가게 문을 열고, 큰 딸이 4살배기를 학교에 보내면서 학교가 끝이 나고 데이케어에 다닐 수 있게 조치를 취하고, 주로 오전 11시부터 내가 가게에 나가는 4, 5시까지 가게를 봐줬다. 평소에 난 도매상을 다니기는 했지만 돈 관리는 남편이 했었기에 그런 부분도 우선 큰 딸이 도맡아 했다. 


 가게 문을 닫을 수도 없어 장사는 하고 있지만 내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이 가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나까지 졸지에 무슨 일을 당한다면, 아니, 난 당장 내일 죽는다 해도 아무런 아쉬움도 미련도 없을 것 같은데, 나까지 남편처럼 가버리면 그 짐을 자식들에게 떠넘겨준다 싶으니 그것이 더 무섭고 두려웠다.


 가게가 잘 되어 사람이라도 쓰고, 마켓에 내놓을 수 있는 정도라면 뭘 또 그렇게 고민을 하겠나. 몇 년 사이에 매상은 더 떨어져 팔려고 선뜻 내놓을 수도 없고, 리스 계약 기간이 있으니 문을 닫을 수도 없는데, 이런 일까지 아이들에게 짐을 지운다는 생각만 하면 눈물이 아니라 걱정부터 앞섰다. 


 그래도 든든한 딸, 사위가 하던 일을 미뤄가며 ‘엄마 구하기, 가게 매상 올리기’ 작전에 들어갔다. 우선 매상부터 끌어올려야 한다며 담배를 2팩 스페샬, 2리터 드링크도 주말이면 2병에 4불 가격으로 팔며, 딸과 사위는 세일하는 품목은 알아서 잘들 사들이며 물건도 떨어지지 않게 신경을 썼다. 


 무엇보다 큰 딸에게 고마운 것은 엄마인 내가 신경 쓰지 않게 가게 일을 하면서도, 몸도 쉴 수 있게 내가 일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주려 애쓰는 모습이 미안하고 참 고마웠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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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한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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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5
추억 속의 표정 더듬기(하)

 

(지난 호에 이어)
우리가 이민을 오게 되면서 관리하기가 좀 수월할까 싶어 부동산을 처분하면서 지방에 임야와 대지를 샀다. 남편도 그랬겠지만 나 역시 믿는 구석이 있어 이곳에서 집을 사야 한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못했다. 


그것은 이곳에서 살다 보니 돈 벌기가 쉽지도 않고, 돈을 벌어 아끼고 저축이라고 하다 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겠다 싶었고, 언젠가는 땅이 팔리면 조그만 집 하나 장만해서 노후에 연금 받으면 살 수 있겠지 싶었다.


 내 이런 생각은 남편이나 딸들에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니 굳이 물질에 연연해서 심적으로 궁핍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난 일은 하고 있으니 즐겁게 일하자 싶었고, 내가 버는 돈에서 다달이 백 불 정도 따로 떼어 놓아 그 돈이 2, 3천불 될 때면 책을 내리라고 서울엘 나갔다. 그러니 그런 마누라, 그런 엄마가 어찌 밉지 않았을까. 새삼 돌아보니 딸들보다 남편에게 참 미안하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남편의 얼굴, 표정이 있다. 파산선고를 하고 콘도를 팔아 콘도용 아파트에 렌트로 이사를 가서였다. 앞으로 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너무도 막막한 상황인데 장모까지 와 계시니, 그나마 집에서도 마음 편히 고민도 할 수 없겠네 싶은 고뇌에 찬 얼굴을 하고 소파에 망연히 앉아 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남편이 "지금 꼭 이런 상황에서 장모님을 모셔 와야 했느냐"고 언짢은 표정, 어투로 말한 게 다였다.


 그 후 남편은 공장, 남의 가게에서 일을 하기는 해도 장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니 한 번도 어깨 펴고 편한 얼굴 모습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 즈음 가끔은 드라이브라도 나가자고 졸라서 나가 봐도 역시 기분전환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급기야 갖고 있던 땅의 일부가 팔려 2000년도에 역이민을 하겠다고 나갔다. 캐나다 땅에 짐을 풀고 살아보려 했다가 이건 아니네 싶어 8년 만에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는 거였다. 뭔가 새롭게 해 보겠다는 의욕은 있었으나 그 사이 많이 변하기도, 그렇게 어설피 준비해서 될 사업이 아니었다. 


 사업이네 증권이네 한다고 하다가 몇 달 만에 그곳에서도 살 수가 없겠다 싶어지니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나 역시도 더 이상 못 견디겠다 싶어 야반도주하듯 남편 몰래 캐나다 행 비행기에 오르고 말았다.


 그때 상황은 악몽 같아 지금도 떠올리고 싶지 않다. 다시 살아 보겠다고 나간 모국에서의 좌절과 실패로 나 역시도 무서워 도망치듯 캐나다로 들어왔으나, 딸들은 내게 아빠 혼자 두고 또 ‘혼자만 살겠다’고 들어 왔느냐며 냉정하게 퍼 부어 대며 내일이라도 당장 나가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그 다음 날로 나가라는 딸들 말에 나 꼭 죽을 것만 같으니 며칠 쉬었다가 다시 나가겠다고 나야말로 딸들한테 사정하듯 했다. 1주일을 있다가 다시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대부분 지나 놓고 나중에 보면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 내가 왜 그랬었지’ 하며 아쉬워하기도,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남겼다며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리 될 줄 미리 알았다 해도, 그 당시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마음으로 치닫기도 하니 그래서도 인생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요, 미완성이란 말도 나오지 않겠나 싶다.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는 남편을 혼자 두고, 몰래 서울을 떠나 와야 했던 내 심정도 참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라도 그 현실에서 벗어나야 숨이라도 돌리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에 남편은 안 좋은 일을 가지고 잔소리하거나 반복해서 되뇌며 나를 괴롭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는 정말 잘못될지도 모르는 자기를 혼자 두고 떠나왔던 것에 대해 만 정이 다 떨어졌다고 했다.


 다시 돌아봐도 참 미안하고 안 됐네 싶어도 그때 공항에 나온 남편은 몰골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몸은 바짝 마르고 이마는 깨져서 약을 발라 번들거리는 얼굴에 삶에 지쳐 이젠 살아갈 기력도 없어 보이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결국엔 그곳에서 살지 못하고 다시 캐나다로 들어왔다. 그 때는 이미 대학생이 된 딸들이 그런 저런 엄마 아빠의 모습에서 자신들이 더 악착같이 살아야겠다 싶기도, 다른 도시에 있는 대학을 가면 두 집 살림을 해야 되겠다 싶기도, 그리 되면 생활이 더 어렵겠다 싶었는지 딸들 둘이 토론토에 있는 대학으로 가 집에서 다녔다.


 우린 부모라야 자식에게 뭘 해준 게 있나 싶다. 등록금을 대준 것도 아니고 용돈 한 번을 제대로 줘본 것 같지 않다. 밥 해주는 거 외에 난 뭘 했을까? 그 후 몇 번을 작은 딸이 집을 사든지 가게를 알아보든지 하라고 채근하듯 해서 가게를 하는 게 우선이겠다 싶어 가게를 하게 되었다. 그래도 야무지고 성실한 딸들이 있었기에 남편이 가게를 하다가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가게를 할 때는, 공장을 다닐 때나 남의 가게로 일하러 다닐 때의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의 표정은 아니었으며, 한국에서 대리점을 하며 자신만만하고 패기 넘치고 여유 있는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으나 삶을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그런 모습으로는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던 그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곳에서는 살면서 한 번도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대학 3학년 때 찍은 환하게 웃던 모습이 다가온다. 그렇게 한 생(生)을 살다가 갔는가 싶은데 그것은 마치도 현실을 모르고 살던 얼굴과 현실, 삶이란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살 때가 그렇게 다른 것이었나 회상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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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한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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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7
추억 속의 표정 더듬기(상)

 

 

 가끔은 TV에서 유명 인사와 인터뷰를 하며 생애(生涯)에서 가장 좋았던,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느냐는 질문을 하는 것을 볼 때면 과연 나는 어떠했나 돌아보게 된다. 


 돌아가고 싶은 좋았던 시절이 있었는가 생각에 잠기다 보니, 살아 온 세월이 나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돌아가 보고 싶다면 남편과 ‘연애’ 하던 그 시절이 아닐까 싶다. 


 남편을 71년도에 만나서 사망하던 2017년도까지 함께 살았으니 46년이란 세월이 된다. 그럼에도 특별히 생각나고 기억에 남는 표정이 얼마 되지 않는다. 다만 '남는 건 사진 뿐'이란 말을 증명이나 하듯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이 떠오른다. 


 남편을 대학 3학년 때 만나 과 단합대회라며 학교 앞 음식점에서 모여 앉았다. 과원이라야 여학생이 5명, 남학생도 15명은 넘지 않았던 것 같다. 식당에 모여 앉아 밥을 먹으며 얘기들을 나누며 난 편입생이었기에 자기소개를 했던 것 같다. 


 그 후 종로의 어느 낙지 집에 모였던 일, 무엇보다 남편, 나, 친구 셋이서 학교 앞 분식집에서 먹었던 라면 맛은 그 후 몇 번씩 되뇌곤 했다. 그 라면 집이 유명했던 것은 라면에 고추 가루를 살짝 넣고 단무지를 주었는데 그 시절엔 그 라면을 참 맛있게 먹었다. 


 3학년 때 답사 차 갔던 장소는 기억도 나지 않는데, 남편이 여학생 몇 명과 가운데서 어깨동무를 하듯 하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 사진을 볼 때면 좋다던 여학생들 틈에 끼여 기분이 참 좋았던 모양이네 하고 상기하곤 한다. 


 사실 '표정 더듬기'란 살아온 날의 흔적, 모습이 될 것이다. 우리 그 시절 학교 다닐 때는 미래에 대한 생각, 걱정도 없지 않았겠지만, 나는 물론이고 남편 역시도 학교생활, 즉 강의 듣고 친구들을 만나면 당구도 한 게임 치고, 가끔은 술자리도 만들고, 우린 학교가 끝나면 을지로에 있는 호수 다방, 명동, 종로, 동대문에 있는 다방 등을 다니며 차 마시고, 밥 먹고, 가끔은 볼링장, 맥주, 소주도 마시고, 영화 구경도 하면서 그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거칠 것, 걱정 없이 2년은 흘러갔다. 하지만 졸업을 하면서는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남편은 졸업과 동시에 춘천에 있는 여자 고등학교에 '국어교사'로 발령을 받아 내려갔다. 하지만 2주를 끝으로 다시 올라 왔다. 그곳에 있다 보니 '교사'가 천직이 되겠다, 라며 더 큰 꿈을 위해 포기하고 올라 왔다고 했다. 


 그 후 군대 문제는 방위로 마쳤지만 직장문제는 마음처럼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원을 다니면서 우선은 생활대책으로 택시를 한 대 사서 운영을 하면서 우린 결혼을 했다.


 그 후 사업에 두 번 실패를 하고 80년도에 제일제당 백설햄 대리점을 하게 되면서 88년도에 제일제당 냉동 대리점, 동원 산업 대리점을 운영하다가 92년도에 이민을 왔다. 


 돌아보면 나나 남편에겐 그 시기가 가장 편안하고 여유 있는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니 그 당시 남편의 얼굴은 별다른 고민 없는 모습이었다. 남편은 3남 2녀의 막내였다.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다지만 14살 위인 생활력 강한 형님 덕분에 별다른 고생 없이 살아온 것으로 알고 있다. 


결혼할 당시 집도 아주버님 것이었고 우리가 결혼을 한 후에도 몇 번 사업자금까지 대 주셨다. 그러니 그런 아주버님이 살고 계셨던 이곳 캐나다로 오는 것이었으니, 남편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보다 아주버님이 계셨기에 이민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민 온 지 4년, 도넛가게 시작하고 3년 만에 파산선고를 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그런 와중에 난 사는 게 너무 무섭고 숨이 막힐 것 같다며 남편이나 딸들의 심정을 헤아릴 만큼의 여유도 없이 서울행 비행기 표를 구입해서 나갔다. 어디 그뿐인가. 언제는 내가 돈을 벌어서 살았느냐며 들어오는 길에 친정 엄마까지 모시고 왔으니 남편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친정 엄마가 보기엔 잘 살겠다고, 더 나은 삶을 찾아 친정, 처가 식구들의 안위는 아랑곳 않고 훌훌 털듯 떨치고 떠나더니 고작 몇 년 만에 ‘그런 꼴’인가 싶은 마음도 있었을 터인데, 그런 모습을 장모한테 보여야 하는 남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새삼 돌아보니 너무 미안하고, 나 밖에 모르는 여자였나 싶어 정말 미안하다. 내 식구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응분의 대가는 지금까지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나의 이기적인 행동으로 인해 작은 딸은 아직도 내게 대한 마음이 곱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사업에 실패를 하고 아이들(큰 딸은 고3, 작은 딸은 중3)이 그 나이에 더 힘들고 겁이 났을 텐데, 아빠나 아이들은 안중에도 없고 엄마 혼자 살겠다고 한국엘 나가더니 이번엔 외할머니까지 모시고 왔으니 말이다. 


외할머니가 우리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형편도 아닌데, 더 이상 비참한 모습은 보일 수 없을 그런 현실을 장모, 외할머니한테 노출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해 얼마나 밉고 싫었을까. 


또 그뿐이면 이해도 하겠지만, 그 후 글쓰기를 하는가 싶더니 이번엔 그걸 들고 책을 내겠다고 서울을 나가겠다고 하니 아무리 엄마라 해도 정말 싫었을 것 같다. 


“무슨 돈으로 책을 낼 것이냐”고 한심스러워 묻는 작은 딸에게, “그건 네가 걱정할 일도 아니고 땅을 팔아서라도 할 것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단호하게 얘기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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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한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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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2
참 딱해요(하)

         
    

(지난 호에 이어)
그런데 언젠가 박완서 씨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중에서 저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신 것을 읽고 또 읽으며 난 너무 재미있어 남편과 아이들에게 읽어 주었다. 


어쩌면 이렇게 표현을 잘 했느냐며 “엄마 심정이 꼭 이랬거든” 하며 역시 대가라 다르긴 다르시구나 하며 읽고 또 읽어보며 웃음과 감탄을 연실 해대긴 했어도 워낙 암기력이 없는 나로서는 감히 흉내도 낼 수가 없다. 


어린 시절 제삿날이 되면 집에서 키우던 닭을 잡는다. 그런데 그때 표현으로는 “닭 목을 비틀어서 죽여야 하는데” 집에 남자들이 없을 때는 닭을 잡지 못해 남자들의 손을 기다리느라 부엌을 들락거렸다. 남자들을 기다리다 시간이 늦어지면 집안에 있던 여자들이 누구인가 닭을 잡아야 했다. 


그때마다 서로가 미루다가 뜨거운 물을 들고 나가서 눈을 돌리고, 한 사람은 두 발을 꼭 잡고, 한 사람은 칼을 들었는지는 기억에 없고 살아 있는 닭을 잡느라 난리를 쳤다. 난 무서워서 이미 대문 밖으로 달아나서 보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런 기억 때문이었는지 게장은 주로 살아 있는 것으로 담가야 제 맛이 난다고 하는데 난 살아 있는 것은 만지지를 못하니, 지금 이 나이까지 그런 연유로 해서 게장을 한 번도 담가 보지를 못했다. 게장을 담그지 못하는 내게 아파트에 살 때 언젠가 훈이 엄마가 담가다 준 게장 맛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고 그때의 그 마음은 아직도 고맙게 간직하고 있다. 


 게장은 담그지 못해도 닭 정도쯤은 내가 손질을 할 수 있겠다 싶어, 언젠가 닭을 한 마리 사다 놓고 보니 닭이 털만 뽑힌 채 통째로 그냥 들어 있었다. 처음엔 으레 닭 목은 제거가 된 채 닭다리만 있겠지 하고 닭이 든 봉지를 꺼내어 놓고 보니, 닭 발은 물론이요, 닭 목까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그래서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어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남편에게 그런 저런 상황 설명을 해 주고는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싶었다.


 남편이 들어 왔기에 닭죽을 쑤려고 했는데 닭이 그대로 있어 준비하지 못했다고 그랬더니, 남편이 “참 딱하다.” 그래 그 나이 먹도록 그런 것도 만지지 못하느냐며 닭 발과 목을 제거해서 내가 보지 않도록 비닐봉지에 꽁꽁 싸서는 쓰레기 통속에 넣고서야 닭죽을 쑬 수가 있었다. 


 시장이라고 시간을 여유 있게 보는 것이 아니라 거의 언제나 필요한 것을 머릿속에서 하나 하나 끄집어내듯 손에 한두 가지 들고 다니다가 안 되겠네 싶어 그제야 바구니를 찾아서 손에 있는 것들을 담는 식이니, 집에 와서 보면 아니 이것도 빠졌네 저것도 없네 하기가 일쑤였다.


 그런 식으로 시장을 보다 보니 닭을 사면서도 닭 발은 본 것 같은데 닭 목은 안으로 밀어 넣었으니 보지 못했던 것이다. 어차피 닭 목까지 보았다 해도 남편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겠지 하고는 눈을 지그시 감고 사고 말았겠지만.


 캐나다에 와서 도넛 가게를 할 때였다. 그 때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일을 하는 브라질 여자가 있었다. 어떻게 밤일을 하게 되었느냐는 내 얘기에 “노 초이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을 하는 거였다. 


그녀는 아이가 셋인가 그랬는데 아이들이 어려서 낮에는 아이들을 돌보아야 하기에 밤일을 해야 하며, 아이들이 어리다 해도 집에서만 있을 형편이 아니고 밤일도 마다 않고 해야 한다는 아니, 선택의 여지없이 그 일을 해야만 한다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밤일 하는 것을 가지고 뭐 선택의 여지란 표현까지 해야 하는 거야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많은 이들이 먹고 살기 위해, 살려니 어쩔 수 없었다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그런데 그 생계 수단으로 해야 하는 일들 중에서 비록 동물일지언정 살생을 해야 한다든지, 그야말로 여자들 같은 경우는 몸을 팔아야 하는 직업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해도 누가 그들에게 직업의 천하고 귀함을 논할 수 있으려나 싶다. 그것은 한낱 배부른 자의, 선택의 여지가 있는 사람들의 투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많은 직업이 있다. 생계를 위한, 직업이 적성에 맞아서 한다면 하는 일에서 보람이나 즐거움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성에도 맞지 않고 더더욱 좋아하지 않는 일인데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의 경우 때로는 내가 꼭 먹고 살기 위해 이 일밖에 할 수가 없는 것이냐고 푸념에 한탄을 하기도 한다. 


그런 생각이 미칠 때면 난 여자로 태어난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든다. 아무래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여자보다도 남자가 직업 전선, 생계를 위해서는 험한 일을 더 많이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굳이 ‘딱하다’는 표현을 써본다면 남이 나를 볼 때 딱해 보이는 것과 나 자신이 나를 돌아 볼 때 딱한 것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타인이 어느 한 사람을 놓고 볼 때 살아가는 모습과 종사하고 있는 일을 볼 때 더 없이 딱해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본인은 타인 앞에 나보란 듯이 살고 있는 듯해도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더 없이 딱한 사람도 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쓸 것인지, 정승처럼 살고는 있으나 개만도 못한 삶을 살 것인지는 삶의 의미,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사느냐가 많이 작용할 것 같다. 


이를테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들은 말고라도 무슨 짓, 무슨 일이든 해서 돈이면 된다는 사람들이나, 비록 보수는 많지 않아도 스스로 ‘자존심’을 가꾸어 가는 사람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 세월이 흐른 다음 회한의 삶을 살기보다는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감이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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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1
참 딱해요(상)

    
    

 아이들이 어릴 때이니 내 나이 30대 초반쯤이었으리라. 언제부터인가 시장엘 나가면 이리저리 돌아보곤 하는데 시장 사람들의 모습에서 진한 연민과 옛날 아버지 모습이 떠올라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노상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겉모습이 꾀죄죄하니 지쳐 보이는데다가 딸만 다섯인가 한다는 시장통의 공주 엄마는 내 마음을 가장 아리게 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시장을 나가면 그 엄마가 으레 눈에 띄곤 하는데 나는 늘 저런 야채 정도 팔아서 저 아이들 공부시키며 살 수 있을까 괜스레 걱정이 되었다. 아침에 장사를 나왔으니 식구들 아침은 어떻게 하고 아이들 도시락은 싸서 보낼 수가 있을까 시선이 머물곤 하였다. 


그러면 교복을 입은 딸들이 돈을 달라고 했는지 앞치마처럼 두른 누런 전대에서 돈을 꺼내 주며 밥은 먹었느냐, 도시락은 쌌느냐며 돈을 좀 아껴서 쓰라는 듯 그런 표정으로 보였다. 그것은 바로 그들을 보며 오래 전의 아버지 모습이 느껴져 자꾸 마음이 쓰였다. 


 그 옛날 아버지가 서울로 와서 쌀가게를 하시며 물건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보며 가슴이 아파왔던 때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우리 7남매 교육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작은 아버지의 잦은 사고로 해서 아버지는 홧김에 서울로 몽땅 올라오신 것이었다. 


 시골에서는 자리도 잡혔겠다 그런 소매상쯤은 하지 않아도 내로라하고 사셨던 양반이 크지도 않은 체구와 키에 가게 방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볼 때면 가슴이 쓸쓸하고 아파올 때가 있었다. 


 처음엔 가게를 하며 삼륜차까지 몇 대 가지고 했는데 아이들이 일곱이나 되니 학비 때문이었는지 차츰 차는 팔고 가게만 하다가 옆집의 방앗간이 이사를 가게 되면서 나중에는 가게와 방앗간을 같이 하시게 되었다. 


 처음엔 물건도 많이 쌓여 있곤 하였는데 내가 보기엔 해가 갈수록 가게가 빈약해 보였다. 난 이따금씩 쌀 한 가마 팔면 얼마나 남을까, 하루에 몇 가마 정도나 팔아야 우리 식구가 먹고 살 수 있으려나 가늠해 보곤 하였다. 


아침이면 언니부터 시작해서 동생들까지 학교에 가면서 돈을 타 가는 것을 보며 얼마나 남는데 저 돈을 다 감당할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어 난 슬그머니 그냥 나가곤 하던 때도 있었다. 


 그랬기에 결혼을 해서 살면서 동네의 그것도 노상에서 장사를 하는 아줌마에게서, 슈퍼를 하는 자그마한 키의 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그들에게서 수시로 아버지의 고충을 유추해 보곤 했던 것이다. 


 그 후로 난 이따금씩 내가 저들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뭐 없을까 고심하던 끝에 기도를 하면 되겠다 싶어 친정 엄마와 시어머님이 다니시는 성당에 가기로 작정하고 교리 반에 등록을 하였다. 


 처음엔 마귀가 시험을 한다더니 내게 해당이라도 된 듯 시작하고 몇 번 나갔는데 꼭 성당을 나갈 시간만 되면 일이 생겨 그것도 4주가 계속되다 보니 나중에는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언젠가 동네에서 나보다 몇 살이나 아래쯤 되는 새댁이 나를 보더니 “참 딱해요.”하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나와 같이 교리를 시작했던 사람이었고 그때는 이미 그 여자는 영세를 받았을 때쯤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무슨 얘기냐고 물어 보지도 못하고, 난 어이가 없어 벙벙하니 듣기만 하고 있었는데 이따금 그 여자가 내게 했던 ‘참 딱해요.’하던 말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동네에서 지나며 우리 큰 딸아이 옷을 유심히 쳐다보기도, 아무 소리도 없이 목 뒤를 제치고 상표를 살며시 까보기도 하였다. 그녀가 보기에 아이의 옷이 예쁘게 보였던 모양이다. 몇 번 그런 일이 있어 얼굴만 기억할 뿐 말 한 번 나눠본 적도 없는, 자세히는 알 수 없는 동네의 새댁이었다. 


 난 처음 내 취지와는 달리 그들을 위해서 올바르게 기도 한 번 못해 보고 이따금 생각이 나면 ‘장사 잘 되게 해 주세요.’ 하며 마음속으로 염원할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딱한 일이 생긴 것이다. 집 앞 골목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닭 집이 새로 생겼다. 언젠가 누가 왜 이 닭 장사를 시작했느냐고 물으니 먹고 살려고 했다는 그 엄마의 얼굴이나 그때의 옷차림까지도 눈에 아른거린다.


 지금 생각해 보면 50대 초반, 중반쯤으로 보이는데 남편과 아들 둘은 가겟방에서 밥을 먹고 있었고, 앞에 두른 앞치마가 지저분했던 것은 닭을 잡다가, 손질하다가 수시로 손을 닦기 때문으로 보였다. 


 손님이 오면 닭장 안에 갇혀 있던 닭을 잡으려 손을 안으로 넣으면, 닭들은 서로 잡히지 않으려 좁은 닭장 안을 꼬꼬댁 소리를 질러대며 도망치듯 하던 닭을 용케도 한 마리 잡아, 칼로 푹 찔러서 뜨거운 물로 데쳐서 털을 뽑은 다음 토막을 원하면 툭툭 쳐서 내 주는 것이었다. 


그런 장면을 지켜보며 난 너무 가슴도 떨리고 그 아줌마가 안쓰러워 보였다. 왜 닭 장사를 했느냐고 물어 봤던 엄마도 그런 광경을 목격하고 나와 같은 심정이어서 그 엄마가 안 되어 보여 물어봤을 것 같다. 그야말로 닭고기는 먹을 수 없으리라 싶게 내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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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5
신용카드(하)


        

(지난 호에 이어)
 그런데 그 늘어만 가는 빚을 언제, 어떻게, 갚을 것인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카드를 쓰면서 단순히 물건 구입을 위해서 썼는지 생활비가 부족해서 썼는지, 등등을 다시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이따금 신문에도 보도가 되곤 하는 가계대출로 인한 빚이 늘어가며, 남편이 직장을 잃게 되면서 생활비로 카드를 쓰게 되었다는 얘기나 카드 사용으로 인한 신용 불량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보도를 보며 나 자신을 돌아보며 편치 않은 마음이 되곤 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일단 생활수준, 형편을 올려놓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그대로 유지를 하려거나, 나도 모르게 예전의 씀씀이 그대로 하며 그 씀씀이가 줄어들지 않아 꼭 현금이 있어야 쓸 수 있었던 때와는 그 차이가 많이 나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나야말로 지금도 그 씀씀이를 줄이지 못해 꼭 사고 싶은 물건, 갖고 싶은 것이 있을 때엔 주저하는 마음이 없지도 않지만, 일단은 사고 본다. 그렇긴 해도 충동구매를 하거나, 낭비가 심한 편은 아니기에 그것은 어찌 보면 카드의 남용일 수도 있겠으나 카드를 활용함도 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카드를 갖게 되면 필요 없이 돈을 쓰게 되어 낭비를 하거나 빚이 늘어난다면서 아예 카드조차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 같은 경우 남의 빚은 물론이요, 자기의 분수, 형편, 수입 한도 내에서 지출을 하게 되니 살림하면서 무리는 하지 않게 되긴 하겠지만 그런 사람들도 경제를 제대로 꾸려 간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즈음 같이 신용카드가 범람하는 시대에 살면서 신용카드 하나 둘쯤 없대서야 본인의 수입도 제대로 활용을 못하고 사는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돈이 필요해서 은행을 찾아갔단다. 그 사람은 그 동안 카드는 물론이요, 은행에서 돈 한 번 빌려 보지 않았기에 나 정도라면 은행에서 어느 만큼의 돈은 빌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음은 커다란 착각이었다. 그것은 그 동안 그 사람이 돈을 빌린 적도 없기에 그 사람의 신용 정도를 알 수 없어 은행에서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신용카드’ 말 그대로 상대를 믿고 돈을 빌려 주는 증서가 되는 것이다. 물건을 구입하면서 당장 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고 한 달 후에, 필요하면 분할로도 가능하니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내 경제력을 십분 활용하는 것이니 그만큼 운신의 폭이 넓어진 것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다’, ‘서로 상부상조 한다’는 얘기가 여기에도 부합된다. 빌려 주는 쪽에서는 상대를 확실하게 믿을 수 있으니 의심하지 않고 돈을 빌려 주는 것이요, 쓰는 입장에서는 돈이 필요 할 때 구차하게 남에게 애기를 하지 않아도 얼마간의 이자만 내면 되니 이처럼 고마운 일이 어디 있을까 싶다. 


 한국에서는 신용 카드를 활용하면서 살았다면, 이민 사회에 와서는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한 번 할 수 없던 이곳에서 필요 할 때 얼마나 요긴하게 잘 쓰고 있는지 모른다. 요긴하게 잘 쓰는 것을 넘어서서 카드가 없었다면 쓰지 않아도 되는 ‘카드빚’을 지고 있음도 시인해야 할 것 같다. 


 어느 날 은행엘 갔다. 그런 일은 별로 없는데 창구에 있던 딸아이 또래의 필리핀에서 온 은행원 직원과 몇 마디 말이 오고 갔다. 나보고 한국엘 언제 다녀왔느냐고 묻기에 그 동안은 3,4년에 한 번은 나가게 되었으며, 이번에도 책 2권을 내기 위해 한국엘 가야 한다고 얘기를 했다. 내 얘기를 듣고 있던 그녀가 고객용 방으로 가자고 해서 들어갔다.


 책상 위에 무슨 용지를 꺼내더니 나보고 지금 쓰고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니 싸인을 하라고 하기에 나중에 딸과 같이 와서 하겠다고 했더니 그럴 필요가 없으며 더 좋은 것이니 지금 당장 싸인을 하라는 것이다. 난 그 싸인을 하라는 그 용지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잘못될 것이 무엇이 있을 것이며, 집에 가서 딸아이에게 물어 봐서 아니다 싶으면 취소를 해도 되겠지 생각을 하며 그 자리에서 싸인을 하라는 곳에 싸인을 하고 돌아 왔다.


 그 즈음 난 마이너스 통장을 쓰고 있었는데 내 통장을 보며 나와 얘기를 하는 짧은 순간 나를 도와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은행에 다녀 온 지 얼마 지나서 은행에서 무슨 체크가 오긴 했지만 잊고 있었다. 그 이후 은행을 갔어도 그 여직원은 볼 수 없었다. 얼마 지나서 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기에 그 은행엔 다시 갈 수가 없었다. 그런 이후 1년도 넘은 어느 날 큰 딸아이가 방 정리를 하다가 그때 우편으로 온 체크를 들고 와서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기에 딸과 얘기를 하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라인 어브 크레딧이란 체크로 카드보다 쓸 수 있는 한도액도 더 많았으며, 이자율도 낮았기에 그 동안 써왔던 비자 카드에 남아 있던 금액을 그 체크로 해서 갚고 보니 이자가 우선 좀 줄었다. 


 영어를 잘 알아듣지를 못했음에도 같은 이방인이기에 마이너스 통장을 쓰고 있는 나를 그녀가 조금은 도울 수 있겠다 싶었는지 나중에 딸과 같이 오겠다는 내 얘기는 뒤로 한 채, 내가 먼저 묻고 원하지도 않았는데 그 자리에서 금방 해 줘서 그 즈음 그 체크를 얼마나 요긴하게 잘 쓰고 있었는지 이름도 모르는 그녀가 그저 고맙기만 하다. 


 같은 약이라도 잘 쓰면 보약이 될 수 있지만, 잘못 쓰면 독이 될 수도 있듯 신용카드 또한 잘 쓰면 많은 경제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절제하지 않고 함부로 쓰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신용 불량자가 되기도 할 터이니 꼭 써야 할 곳, 절제를 해야 함이 참으로 절실하다 하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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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6
신용카드(중)

                

(지난 호에 이어)
 남편이 내게 선심 쓰듯 하나 만들어 준 신용카드와 백화점 카드 하나로 내 수입, 즉 남편이 가져다 주는 생활비 한도 내에서 무리하지 않고, 마음 편하고 즐겁게 애용을 했었다. 


그것은 남편이 가져다 주는 고정된 월급은 한 달을 다 쓰고 나면 또 그만큼의 돈은 가져다 줄 것이란 확실한 수입, 보장된 수입, 고정된 수입이 있었기에 신용카드를 쓰고, 때에 따라서 긁어 댄다 싶어도 막말로 못 갚으면 아파트라도 팔아서 갚을 수 있는 확실한 재정이 있었으니 신용카드를 쓴다 해도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았었다. 


 남편이 준 신용카드로 처음 구입을 한 것이 모피 코트였다. 아무래도 고가품이다 싶으니 일시불로는 크게 부담이 되지만 얼마간의 수수료만 내면 6개월, 1년 분할로도 가능하기에 부담 없이 사게 되었다. 


그 다음에 그 카드로 작은 딸 자모가 강북에서 보석상을 하고 있었는데 시내보다 가격도 저렴하고 디자인도 마음에 들어 이따금 가게 되면 패물 하나씩을 구입하게 되었으니, 나야말로 카드 덕을 톡톡하게 보고 활용을 한 셈이었다. 


 그런데 이민사회, 캐나다에 와서 내가 쓰고 있었던 비자카드라는 것은 쓸 때의 마음이나 쓰고 돌아설 때의 마음은 묵직한 무게로 다가올 때가 있었다. 캐나다에 와서 얼마 되지 않아 둘째 동서와 백화점을 가게 되었다. 난 그 때도 물건을 사면서 현금 대신에 카드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둘째 동서야말로 캐나다에 나보다 거의 7, 8년 먼저 와서 살았는데 신용카드 하나 없이 살고 있었다. 한국이나 이 사회에서나 여자가 직장을 가지고 있는 경우엔 굳이 남편 손을 빌지 않더라도 신용카드 하나 둘쯤 소지하는 것이야 극히 당연하고 정상이라 볼 수 있지만, 직장이 없는 경우엔 남편이 신경을 써 주지 않으면 카드를 얻기가 그렇게 용이하지 만도 않다. 


 둘째 동서야말로 집에서 살림만 하다 보니 게다가 아주버님께서 별로 신경을 쓰시지 않았기에 그 흔한 신용카드 하나도 없음에 나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후 어느 날 작은 아주버님을 뵙게 되었을 때 동서가 아직도 신용카드가 없는데 하나 해주시지 그러느냐고 했더니 카드가 무슨 소용이며 카드가 있어야 돈만 더 쓰게 된다는 얘기에 두 번도 카드 건에 대해서는 거론을 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둘째 동서도 신용카드 하나 둘쯤이야 소지하고 있겠지만 소위 남편이란 사람이 아내가 돈을 필요 이상으로 더 쓰게 될까 봐 그런 배려도 하지 않았다면 그런 사실들을 몰랐을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남편이 아내에게 그런 인심도 쓸 줄 모른다는 남편의 저의를 간파하게 되면 그 이상의 애정은 가지 않게 된다.


 가정 형편, 경제적인 사정은 상세하게 밝히지 않아도 아내들도 그런 것쯤이야 알고도 남고, 살림하는 여자가 자기의 형편, 분수 이상 신용카드를 써댈 여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아내에게 신용카드 하나쯤 선사하는 것은 그것을 쓰지 않고 갖고 다니기만 해도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되는 것인데, 그런 배려도 하지 못하는 남편에게 그것을 기대하는 만큼 마음도 멀어지게 된다. 


 캐나다에 와서 처음 얼마 동안은 한국에서 쓰던 마스터 카드를 가지고 쓰다가 몇 년 지나 큰 딸아이가 하나 만들어준 비자 카드와 기름 넣을 때 쓰는 기름 카드만 있으면 현금을 소지하지 않아도 물건을 구입할 때나 기름을 넣을 때나 카드 하나로 대용하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카드 사용 액수가 누적이 되면서부터 그 이상으로 마음이 짓눌렸다. 곰곰 따지고 보면 한국에서처럼 부동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편이 가져다 주는 생활비 외에 남편의 주머니까지 엿볼 수 있는 형편도 아니어서 카드를 쓴다 함은 ‘빚’이 점점 늘어간다는 중압감에 시달릴 때가 있었다. 


 돈이라는 것, 지출을 한다는 것은, 수입이 전제가 되었을 때, 갚을 것을 예상해서 쓰게 되어 있는 것이지, 수입은 적은데 쓸 곳은 생기고 어쩔 수 없어 신용카드를 쓰게 되니 그래서 마음은 마냥 짓눌렸다. 


 신용카드가 생기기 이전엔 외상이라고는 져본 적이 없다. 아니 돌이켜보면 결혼해서 몇 년 되지 않아 동네 식품점에서 두부인지 파를 한 단 외상으로 사고는 밤새 마음이 불편해서 뒤척인 적이 있었다. 그 돈이야 그 다음날 바로 갚았지만 그때야말로 새댁이 동네 식품점에 가서 외상을 한다 함은 마냥 초라하고 주눅들어 견딜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만큼 외상이라 하면 해서도 안 되고,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는데, 이건 식품비가 아닌 무엇이든 사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조그마한 카드 한 장이면 못할 것이 없으니 현대판 ‘도깨비 방망이’가 아닐 수 없다. 


 카드 별로 사용할 수 있는 한도 액수도 높은 것이 많아 현금이 필요한 경우 남에게 구차하게 얘기하지 않아도 만사형통으로 해결해 주고 있으니 그 편리함이야 말해서 무엇 할까마는, 엄밀히 따지고 보면 카드를 쓰는 그 행위 모두가 ‘빚’을 지는 것임에도 수중에 돈이 없어도, 또한 한꺼번에 그 빚을 다 갚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과 맹점 때문에 카드 빚이 늘어가기 십상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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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2
신용카드(상)

          

 우리사회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70년대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다닐 때였는지 그 후였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어느 고등학교 친구가 동창 중 누가 신세계에서 신용카드라는 상품의 회원권을 판매하는데 그 세일즈 우먼으로 일한다고 했다. 


 그녀는 대학 진학은 하지 못했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가끔은 반에서 1, 2등을 하며 노력파에 억척스러운 면도 있는 아이였다. 그 당시만 해도 여자들이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 경우는 능력이 뛰어나거나, 가정 형편 때문이거나,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면 그저 대학을 나왔다 해도 좋은 신랑감 만나서 결혼하는 것을 제일로 꼽던 시절이었다.


 그런 사고에 젖어 있던 내가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신용카드'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을 듣기는 했어도 이해가 빨리 되지를 않았다.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있는 나로서는 여고 동창생의 사회 진출은 조금은 극성스러운 여자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얼마 지나 남편이 신세계에 근무하고 있던 대학 친구가, 그 신용카드라는 것을 갖고 있으면서 또 직원에게는 몇 프로의 할인 혜택에 무이자로 삼 개월까지는 요금을 분할로도 가능하다고 해서, 그 친구 신용카드로 신세계에서 옷을 한 벌 사 입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그 즈음 조금 지나 남편도 ‘신용카드’라는 것을 갖고 다니면서 현금 대신 카드를 쓰기도 했다. 그런데 처음엔 카드가 발급되어 사용하는 것이 카드 가맹점이 미처 뒤따르지 못할 만큼 카드 사용을 만능으로 할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랬기에 어떤 때는 밖에 나가 현금 대신 카드를 내어 밀면 “우리 업소는 아직 카드를 받지 못하는데요.”하는 소리를 이따금 듣기도 하는 것이었다. 


 차츰 카드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그 이전엔 지갑에 돈을 두둑하게 넣어 가지고 다녀야 여유가 있어 보이던 사람들이 이젠 현금 대신에 신용 카드만 한 개, 차츰 몇 개씩 넣어가지고 다니는 것이 그 사람의 재정적인 능력을 은근히 과시하는 '명물'이 되기 시작했다. 


 신용카드가 점차 일반화되어 가면서 신용카드 한 두 개쯤 없는 사람은 그야말로 시대감각이 뒤떨어지거나, 말 그대로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기 십상이었다. 


  남편이 신용카드를 하나 갖고 있으면서 나도 하나 해줄까 하고 언뜻 비치더니, 신용카드를 만들어 줌으로 해서 내게 보이지 않는 어깨에 힘을 실어주고 싶지 않았는지, 쓸데없이 돈이나 더 쓰겠다 싶었는지, 내게 신용카드의 매력이나 위력은 안겨주고 싶지 않았는지, 내 기억으로는 남편이 신용카드를 사용하기 시작하고도 몇 년이 지난 다음 신용카드를 선물로 받았다. 


 결혼을 해서 신용카드 하나 없이 살다가 강남으로 이사를 해서 88년도쯤에 백화점 카드를 하나 갖게 되었다. 아파트 옆에 있던 뉴코아 백화점 신용카드 발급 창구를 찾아갔더니 개인에겐 재산세 납부 증명서와 주민등록 등본만 있으면 되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대부분 남편의 직장과 직장 내에서의 직급 등으로 미루어 신용카드가 발급되곤 하는 것 같았는데, 나 같은 경우는 남편이 자영업을 하고 있어 재산세 납부 증명서는 재정 상태가 가늠이 되는 것이어서 그쪽에서 요구하는 서류를 제출하고 백화점 신용카드를 하나 취득하게 되었다. 


아마 그 즈음 남편에게서도 마스터 카드 하나를 선사 받아 뉴코아 백화점이 아닌 곳에서는 마스터 카드를 쓰게 되니 현찰은 거의 쓰지 않아도 불편함이 없을 정도였다. 


 그 즈음엔 이미 카드도 실버니 골드니 일반회원이니 하는 식으로 구별이 되기 시작해서 물건을 구입한 후 카드만 내어 밀어도 이미 상대의 신분이나 재정 상태가 짐작이 가는 터여서 종업원도 그 카드 여하에 따라 상대에게 대하는 태도부터가 달라진다. 


 우리네 속담에 ‘외상은 남의 소도 잡아먹는다.’더니 아닌 게 아니라 돈을 지불하지 않고도 물건을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었는지 난 그때부터 그런 습성이 생긴 것 같다. 


 카드를 사용하기 그 이전엔 어림도 없었을 터인데 카드를 사용하기 시작한 후로는 현찰, 즉 현금을 낼 때는 ‘아깝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카드를 쓰고 난 후 카드 대금을 지불하는 돈은 으레 내는 것인 줄 알고 아까운 마음이 덜 드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떤 사람은 나중에 카드 대금을 내는 것은 딴 돈 들어가는 것 같아 더 아까워 가급적이면 카드를 쓰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는데 ‘외상 심리’가 내겐 더 작용을 하는지 현금보다는 신용 카드를 더 애용하곤 한다. 


 그 즈음엔 다시 카드 발급하는 회사도 많아져 지갑을 열면 은근히 여러 개의 카드가 ‘나보란’듯이 꽂혀 있어야 과시하는데 힘을 실어주기까지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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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soonja
한순자
68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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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8
싸인(하)

 
                 
  

(지난 호에 이어)
그래서 그 다음엔 영어 학교를 다닐 때 이번이 기회이다 싶어 영어 선생님께 싸인 좀 멋지게 해보고 싶은데 내 이름자 가지고 어떻게 써볼 수 있겠나 여쭤 보았건만 선생님께 별다른 소득도 보지 못하고 이젠 하나의 일관된 싸인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또 싸인이란 말 대신에 이니셜로 쓰라는 얘기가 있다. 이니셜은 영문자에서 앞 뒤 한자씩으로 간단하게 써넣는 것으로 정착을 하였으나 난 그 싸인이란 것을 한국에서 쓰기 시작해서 꽤 여러 해를 거듭해서 하나의 싸인을 제대로 만들어 내었으니 그냥 쓰기만 하면 되는 싸인도 이렇게 시행착오를 하였는데, 그 싸인은 곧 나의 이름이요, 나 자신 일터이니 신용카드를 쓰고 난 후나 은행에서 쓰는 싸인이 아닌 내 이름자로 나를 나타낼 수 있는 싸인이 되어야겠다 싶으니 다시 또 싸인을 만들어 내었던 과정만큼이나 묵직하게 자리잡아 온다. 


 예전부터 남의 빚보증 서는 자식은 낳지도 말라고 얘기할 만큼 ‘빚보증’이란 말 그대로 남의 돈을 빌려 쓰는 일에 보증을 서면서 만약 상대가 그 돈을 갚지 못했을 경우엔 그 빚을 대신 갚아준다는 서명이나 다를 바 없다. 애초부터 빚보증을 부탁하는 사람에게 그 짐을 지우려는 것이야 당연히 아니지만 더러는 남의 빚보증을 잘못 서게 됨으로 해서 아닌 게 아니라 팔자가, 운명이 달라지는 경우도 더러는 있으니 오죽해야 남의 빚보증 서는 자식은 낳지도 말라는 극언까지 나왔을까 싶다. 


남에게 빚보증을 부탁해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면 어쨌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어려움을 극복해 보고자 방법을 강구하다 보니 그런 와중에 남에게 어려운, 해서는 안 되는 부탁도 하게 되는 것인데 빚보증을 부탁하는 사람만큼이나 부탁 받은 사람도 답변을 해주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결혼을 하고 보니 친척 중에 딸 둘과 장애자 아들과 같이 사는 분이 있었다. 그런데 그 분이 직장을 꾸준하게 다니는 것 같은데 가세가 무척 곤궁한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꽤 오래 전에 빚보증을 잘못 서게 되어 그때까지 그 빚을 갚느라 여유가 없다고 했다. 


난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와 성씨가 같기도 했는데 거의 10년도 넘는 세월 동안 내가 한 푼도 써보지 못하고 그 빚으로 인해 가세가 필수도 없었건만, 그로 인해 원망이나 찌그러지고 뒤틀린 심사가 느껴지지 않아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분이다.


그 분은 약주를 워낙 좋아하셨는데 착하고 바른 심성 덕분인지 소아마비 자식, 소아마비 동생이건만 식구들 모두 그 동생을 끔찍이도 위하고 남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내보이며 살았던 그 가족의 성품이 더 인상적이어서 타고난 심성, 바탕이 고운 모양이라며 가슴에 새기게 되었었다. 


 그러나 이젠 신용카드라는 것이 나오고 보니 어찌 보면 남에게 꺼내기 어려워 망설여지고 힘들었던 그런 요인들이 좀은 수월해졌다 싶기도 해서 내가 물건을 외상으로 사고 내가 갚겠다는 싸인을 하고, 현금으로 인출해서 쓰고 하다 보니 ‘카드빚’은 점차 늘어나고 있건만 남에게 부탁을, 남에게 어려운 얘기를 꺼내는 것이 아니니, 심적인 부담이 그만큼 적기에 본인도 크게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카드빚이 늘어가기가 십상이다.


 이를테면 내가 쓰는 빚을 내가 써주는 그 싸인이라는 것으로 해서 늘어만 가게 되었으니 남의 빚보증을 서는 자식을 낳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나 할 것 없이 내가 그 자신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때로는 카드를 쓰고 싸인을 하고 돌아서며 내가 지금 이것을 카드로 꼭 써야만 했는가 하고 살펴보게 됨은 그나마 ‘카드빚’을 좀 줄이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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