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가족 돕기 마라톤 대회 참가
(지난 호에 이어)
80년대 초 동부 전선의 사단 사령부에서 근무할 때, 장군 예우에 대한 엄격한 규율은 물론 감히 접근조차 어려웠던 사단장의 모습이 문득 떠 올랐고, 사단장과 동일 계급을 다신 분이, 이곳 캐나다 국방부 카페에서는 병사들과 자연스럽게 아무런 신분적 특권 없이, 같은 조건으로 스스로 해결함이 몸에 배인 듯 해 문화적 충격으로 닿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중 곰곰 생각해 본 결과, 그것은 아주 본받을 만한 솔선수범이었고 매우 합리적이란 생각에 이르렀다. 즉 어쩌면 저런 평소의 가식 없는 행위가 선행될 때, 전장 터에서는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진정한 군인들의 세계가 형성될 수 있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므로 캐나다 군대는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해서, 계급에 따른 지휘 계통을 세울 때와 동등한 인격체로서 일반 사회생활을 할 때를 구분 할 줄 아는 군사 문화 선진국이란 생각마저 들었던 것이다.
그 동안 한국 군대문화도 많이 개선되어 왔다고 얘기는 들었지만, 그러나 여전히 과잉이다 싶은 “장군 전용”이란 수식어가 붙은 식당, 위락 시설 등을 비롯, 권위적이고 비민주적이었던 군사문화의 잔재를 개선하여 점차 발전하는 민주적 강군으로 거듭나길 기원해 본다.
3. 신호등 꺼진 교차로, 교통경찰 없이도 “No problem”
이민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겪었던 제법 오래된 일인데, 아직까지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걸로 봐서, 나름대로 상당히 인상적으로 받아졌던 일인 모양이다.
특정 신호등 정전 사태가, 그토록 번잡하고 교통량이 많은 사거리에서 어느 날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작스레 발생한 사고임에도 불구하고, 운전자 모두가 자발적으로 질서 정연하게 차례를 지켜가며 순차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저력과 시민정신은 어디서 비롯 되는가? 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보게 된 사건이었다.
본인도 엉겁결에 처음 당해보는 일이었지만 다른 운전자들이 하는 방식대로 나름 침착하게 대처했다. 운전자 각자가 차례대로 네 방향에서 순차적으로 빠져나가는 광경이 당초 우려한 혼돈이나 무질서의 상황이 아니라, 너무도 신기하고 절묘해서 차라리 아름답기까지 한 모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했다.
여하튼 혼잡을 겪을 것이란 우려와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별다른 무리 없이 신호등 꺼진 복잡한 사거리를 여유롭게(?)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누가 통제 했거나, 교통 경찰이 있어서 그 수신호에 따라 움직였다면 신기해 할 이유도 없지만, 시민들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자칫 혼란의 사태로 빠지기 쉬운 상황을, 외부 도움 없이 물 흐르듯 하나 하나, 차례 차례 각자의 질서를 지키며 해결해 나가는 것이 참된 민주 시민의 힘이요, 저력이란 걸 새삼 느끼게 된 계기였다.
이런 성숙된 시민 의식이 축적되어 오늘의 캐나다란 나라가 성립되었다는 것과 그런 연유로 캐나다는 또 선진국이라 일컬어진다는 사실을 직접 목격하며 경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자율적 시민 의식을 가진 캐나다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감사했던 기억이 새삼 되살아 난 듯하다. 떠나온 조국, 한국도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기대하며, 천천히 차근차근, 비록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우리가 꼭 이루어 낼 것이라 생각한다.
4. 헌혈 57번째, 중년 부인과 나의 헌혈 스토리
헌혈은 한국에서 고교 2학년 시절, 첫 헌혈 행사에 참가한 이후, 직장 생활 할 때도 몇 차례 더 참여했던 경험이 있다. 기본적으로 헌혈은 건강이 허락해야만 가능하니, 자신의 건강 상태를 간접적으로 점검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 같다.
이민 후 커미셔너로서 국방부 청사에서 근무할 때였는데, 안내 표지가 눈에 띄었다. 즉, 주말에 헌혈 행사가 있으니 참여를 바란다는 공지였다. 그냥 무심하게 읽고 집으로 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민 와서 먹고 사는 문제와 아이들 학교, 주거 문제 등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는 가운데서도, 항상 마음 한 켠에는 뭔가 의미 있는 일을 갈구하는 바램이 잠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자 마침 “헌혈”광고를 보고 신체만 건강하다면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버스 안에서, 주말 헌혈 행사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행사 당일은 다행히 근무가 없었다. 청사에 도착해서 신분 확인 후, 기본 검진 후 마침내 헌혈을 마쳤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채혈 양이 한국의 거의 2배 가량 되어 무척 놀랐다. 그런데 옆 침상에 누워 헌혈을 하던 부인은, 이번 헌혈이 57번 째라며, 헌혈을 하게 되면 오히려 자기건강을 더 돌보게 된다고 하여 존경스럽단 생각이 들었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어 이를 계기로 실행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이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는데 이유를 생각해보니, 이민 초기에 겪었던 어려움은 신체적, 정신적으로도 상당한 부담이 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혈”이란 순수한 의미만 생각하다 낭패를 겪은 것이다.
첫 헌혈 이후, 두 번 더 헌혈 행사에 참여 했었는데, 마지막 3번째는 하지 말았어야 할 헌혈이었다. 즉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특히 헌혈 당일, 야간 근무가 있는 날에 이루어진 바라 사고가 난 것이다.
여건이 허락하지 않으면 당연히 “No”하고 거절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헌혈 후 야간 근무 중에 심한 어지럼증과 구토 증세를 느껴 화장실을 가다 의식을 잃고 앰블런스에 실려간 사건인데, 난생 처음으로 기절을 경험한 것이다.
좋은 일 하다 그랬지만, 내 몸이 견딜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병원에서 링겔 주사를 맞고 깨어나 보니,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회사에서 누가 다녀 갔는지 모르지만 야릇한 서러움이 느껴졌다.
그 후론, 본인의 건강은 스스로 지켜야 함을 깨닫고, 병원 헌혈 대기자 명단에서도 제외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만일 그로 인해 본인이 위기 상황에 처한다면, 나의 가족은 누가 돌볼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민 생활이 만만치 않다는 것과 무리하면 화를 자초하게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묘한 우연의 일치일까, 최근 대한민국 ROTC 중앙회에서 헌혈 행사를 적극 장려하고, 동기생들이 앞장서서 참여한다는 기쁜 소식이 먼 곳, 캐나다까지 들려왔다. 본인도 동참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한다.
5. 빛나는 모교 졸업장, 캐나다 학위와 동등하게
이민 와서 자랑스런 기억 중의 하나가, 모교인 동아대 학위증으로 캐나다의 것과 동등하게 인정받고, 장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이민 3년 차 시절, 오직 그땐 경찰에만 관심을 가졌을 땐데, 이민자들 중 캐나다 경찰이 되고자 하는 이를 위해 마련된 Advanced language training for Policing 이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참가자들은 출신 국가에서 경찰이나 군인으로 근무했던 이들이 많았고, 본인도 대한민국 ROTC 출신으로 열심히 참여했다. 본 과정에서 캐나다 경찰에 대한 기본 소양과 법률 체계 등을 배울 수 있었고, 각 경찰의 인사 담당들이 나와 상세 설명과 시범을 보여줘 아주 유용했다.
본 교육 기간 중에 모국에서 이수한 고교 및 대학 학력을 캐나다의 ICAS (International Credential Assessment Service of Canada)란 공식 기관을 통해 동등 자격 여부를 확인해 주었는데, 그 때 모교의 학위증을 인정 받았던 것이다.
학위 인정 후, 자격에 걸맞은 직종에 응시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경찰은 고졸에 영주권자(단, 연방경찰인 RCMP는 시민권자)면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졸 직종을 동등 학위증으로 취업한다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고교 졸업장인 디프로마(diploma)를 요하는 시큐리티 직종에 응시했고, 처음 대졸 동등(Equivalency) 학위로 응시한 것이 캐나다군 장교 시험이었다. 전 과정 중 필기 및 신체검사, 체력, 인성, 인터뷰 등을 통과 후, 마지막 10년 배경 체크에서 8년 뒤, 합격 소식을 접하게 되어 아쉬웠지만, 충분한 보람과 가치가 있었기에 소개하는 바이다.
만일 본인(43세 응시, 51세 합격통보)보다, 좀 더 젊은 나이에 준비하여 진정 캐나다 군에 도전할 의사가 있다면, 동등 학위를 활용하고, 영어 실력 향상에 주력하면서, 별도 본인 비용 없이 시도하면 도전할 만하다는 것이다.
즉 밑질게 없는 것이다. 즉 응시해 놓고 다른 생업에 종사하면서 여유 있게 임하란 것이다. 높은 사회적 위상과 고수입 등 여러 측면에서 괜찮은 캐나다 장교 시험에 도전해 볼 것을 권해 본다.
최선을 다해 목표를 이루고자 하면 차선책으로 일반 군인의 기회도 주어질 것이다. 일반 군인 역시 상당히 높은 임금을 받는다. 또 한번 영어 실력의 중요성을 명심하고, 이민자가 선택 할 수 있는 직종이 한정된 가운데서, 만일 영어와 체력이 된다면 의미 있는 도전인 것이다.
혹시 이 글을 접하는 30대 중반의 예비역 중, 진정 새롭게 캐나다 군에 도전할 의사가 있다면 43세에 시도한 본인의 무모함이 당신의 꿈을 실현하는 촉진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참고로 아들의 지인인 캐나다군 한인 장교 한 분이, 늦은 나이에 응시해서 현재 킹스턴에서 군종 장교로 근무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면에 본인의 경우는 비록 훈련 입교는 불가했지만, 캐나다군 장교 시험을 통과했다는 자긍심은 캐나다에 살아가는 나만의 소중한 자존심이자 버팀목 임을 고백해 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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