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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한국의 대학생활이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대학을 다니던 70년대만 해도 지방출신 학생들이 서울로 상경해 대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소위 ‘아르바이트’를 통해 학비를 조달하는 일이 흔했다. 그 중 대부분은 초.중.고교생의 과외를 지도해주고 학비와 용돈을 버는 가정교사가 많았다.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는 시골 출신 대학생들의 중요한 학비 조달 수단이었다.


 충청도 시골 출신인 나도 70년대 중반 2월 어느날,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괴나리 봇짐을 꾸려 서울로 상경했고 처음 몇 달 간은 학교 앞에서 하숙을 했는데, 홀어머니가 시골에서 부쳐주시는 알량한 쌈짓돈으로는 하숙비와 용돈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누구나 그렇듯이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러 나섰다. D 일보사를 찾아가 ‘입주 아르바이트 원함. 특히 영어 자신’이라는 줄광고를 냈더니 몇군데서 연락이 왔으며, 그 중 학교에서 가까운 성북구 미아리 지역에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됐다.


 그런데 그 집은 가정교사를 둘 정도로 부유한 형편은 아니었다. 남편을 여의고 홀로된 50대 초반의 주인 아주머니 슬하에  3녀1남을 둔 평범한 가정이었는데, 나는 그 집 막내인 중학교2학년 짜리 외아들과 함께 기거하며 숙식을 해결하고 공부를 가르치게 됐다. 막내에 외아들이니 얼마나 애틋한 자식이겠는가. 그러나 인텔리 여성이었던 주인 아주머니는 바로 그 점을 걱정하면서 “공부보다도 먼저 아들의 정신상태부터 고쳐달라”고 당부했다. 즉, 막내인 탓에 버릇이 없으니 엄격한 형으로서 친동생처럼 대하며 생활태도부터 잡아달라는 것이었다. 가정교사 월급까지 지출해 가면서 생활할 형편은 아니었는데 굳이 그랬던 것도 집에 여자들만 있다보니 외아들이 나약하고 버릇없이 자라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그리했던 것이다. 


 나 자신이 집안의 막내로 버릇 없이 자랐는데(?), 주의산만한 사춘기 소년 훈육하랴 공부도 시키랴  하려니 처음엔 다소 힘이 들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니 고삐 풀린 망아지 같던 그 녀석은 그런대로 말도 잘 듣고 규칙적인 생활에 익숙해져갔으며 성적도 조금씩 나아지면서 차츰 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 후 약 6개월이 지나니 나를 “선생님”보다는 “형, 형” 하면서 따랐고, 가족 모두가 한식구처럼 지내며 생활하게 됐다. 


 세 명의 딸 중에는 나보다 세 살 위인 큰 딸(직장생활)과 한살 아래인 둘째 딸(재수생), 두 살 아래인 셋째 딸(여고 2학년)이 있었는데, 혈기왕성한 청년 대학생이 한 집에서 4명의 여자들과 함께 살다보니 처음엔 무척 어색하고 어찌 처신해야 할 지 몸둘 바를 몰랐다. 특히 요즘같은 여름철엔 노출이 심한 옷들을 입고 있어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당황스러울 때가 많았다. 주인 아주머니는 이런 점을 알아채고는 나를 “큰 아들”이라 부르며 스스럼 없이 대해주려 노력하셨다. 집에 누가 오면 “우리 큰아들”이라 소개했고 그러면 손님들은 농담으로 “언제 이렇게 큰아들을 두었어?”라고 화답하곤 했다. 막내 딸은 나를 “오빠”라 불렀고, 나는 주인아주머니를 “어머니”, 큰 딸은 “누나”라 불렀고, 나머지는 그냥 이름을 불렀다. 학교 축제 땐 둘째 딸을 파트너로 데려 가기도 했다. 


 여름엔 가족들이 모두 함께 수유리로, 인천 송도로 물놀이를 다녀오고, 밤이면 마당에 불판을 피워놓고 고기를 구워 먹으며 맥주도 마시면서 두런두런 이야기 꽃을 피웠다. 나는 더 이상 과외 선생님이 아닌, 한가족 구성원이 되었다. 그중에도 나와 나이가 비슷한 둘째 딸은 장래 진로문제 등을 놓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흔히 이런 상황이면 자연스레 세 명의 딸 중 누군가와는 ‘인연’이라는 것이 맺어질 법도 했을 터인데, 하늘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나 보았다. 그 후 그 집이 이사를 할 사정이 생겨 2년에 걸친 입주 아르바이트도 그만두어야 했다. 그 후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가서도 나는 수시로 그 집 가족들과 편지연락을 주고 받았으며, 사회에 나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가끔 강남에 있는 그 집을 방문해 놀다오곤 했다.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자면 , 나는 성격도 명랑하고 외모도 그중 나은 셋째 딸을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었고, 술에 취하면 가끔 친한 친구에게 그런 말을 횡설수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연은 따로 있었는지, 지금의 아내를 만나면서 그쪽의 기억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지금 생각해도 대학생활의 기억 중에 미아리에서 아르바이트로 생활했던 2년 여의 기간은 아주 또렷하고 달콤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것의 원래 목적은 학비 마련이었지만 주인아주머니를 잘 만난 덕에, 또한 가족 구성원들이 너무 좋았던 덕에 ‘남의 집 살이’에서 겪었을 고달픔이나 어려움보다는 아름다운 추억들만 아련히 남아 있다.  


 이런 추억은 단지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시골 출신 대다수가 당시 가정교사를 했고 그때 과외교사와 제자로 만난 동창들 중에는 나중에 부부 사이로 발전한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다. 따라서 대학시절의 아르바이트, 그 중 대부분을 차지했던 가정교사 일은 캠퍼스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때론 학비조달이라는 각박함도 있었지만 이를 단순히 고생으로만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때 함께 지냈던 아주머니와 세 딸들, 막내녀석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들 살고 있을까.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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