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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2017
유명 음악가 시리즈(VII)-'비발디’ (Antonio Vivaldi, a Prince of Venice)' (1)
youngho2017

 
비발디는 과연 성자인가, 죄인인가? 

 

 

 

 

 유명음악가 시리즈 중 일곱 번째로 '사계(四季, The Four Seasons)'로 유명한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바이올리니스트이며 바흐, 헨델과 더불어 '바로크 삼총사'로 불리는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1678~1741)에 관한 영화 한 편을 소개할까 한다.


 2006년 개봉한 '안토니오 비발디, 베니스의 왕자(Antonio Vivaldi, a Prince of Venice)'이다. 한국에는 '비발디'라는 축약된 제목으로 2009년 1월8일에 개봉. 감독은 프랑스 파리 출신 장 루이 길예르모. 출연 스테파노 디오니시, 미셸 세로, 아네트 슈라이버 등. 러닝타임 95분. 


 아마도 한국 개봉이 늦었던 이유는 흥행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OST는 최고이지만 영화는 대사, 영상, 편집, 연기 어느 하나 예쁜 게 없는 최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리넬리(1994)'로 쌓은 스테파노 디오니시의 명성을 형편없이 무너뜨린 작품이지 싶다.


 하지만 20세기 중반에서야 비발디에 관한 음반이 나오면서 21세기에 이런 영화도 제작되기에 이르러 그에 관한 편린을 접하게 된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된다.

 

 

 

 

 


 영화의 오프닝 씬, 1708년 9월29일 철창문 안에서 피에타 양육원의 고아소녀들이 합주를 하고, 오직 비발디(스테파노 디오니시)만 철창문 바깥 홀에 앉아있는 귀족들 앞에서 바이올린 협연을 하며 지휘한다. 베네치아로 놀러 온 덴마크의 국왕 프레데리크 4세(바스티엥 이후장)를 위한 콘서트였다. [註: 예술애호가로 이름 높았던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4세(Frederik IV, 1671~1730)에게 비발디는 자신의 "바이올린 소나타집 Op. 2"를 헌정했다. 프레데리크 왕은 덴마크의 예술, 건축 등 문화 및 무역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1722년 코펜하겐에 덴마크 최초의 공중 가극장인 리유 그로네게이트 대극장(Lille Gronnegade Theatre)을 설립하였다. 또한 루터교 선교사인 한스 에게데(Hans Egede, 1686~1758)를 후원하여 지금은 덴마크의 자치령인 그린란드(Greenland)와 수도 누크(Nuuk)를 처음 개척했던 인물이다.]


 이때 나오는 음악이 "조화(또는 화성)의 영감(L'Estro Armonico), 작품 3, 바이올린 협주곡 6번 A단조, RV356" 중 '1악장 알레그로'이다. [註: 작품 1과 2가 '바이올린 소나타'였던데 반해 작품 3은 '바이올린 협주곡'의 첫 작품으로 1711년 암스테르담에서 출간하여, 베네치아를 방문한 플로렌스 투스카니의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 대공(1663~1713)에게 헌정되었다. 자신도 훌륭한 음악가였던 페르디난도 대공은 스카를라티(1660~1725), 헨델(1685~1759) 등 음악가들의 후원자로 유명하지만, 특히 하프시코드 제작자인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Bartolomeo Cristofori, 1655~1731)를 적극 후원하여 피아노를 발명하게 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첫 장면부터 철창문을 사이에 두고 연주하는 괴이하고 우스꽝스런 모습이 연출되는데, 당시 고아원이라는 특수상황 때문이기도 하고 또 여학생들이어서 '일반 대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이 금지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학원의 학생들의 오케스트라는 당시 유럽에서 명성을 떨쳤기 때문에 비발디는 양육원을 방문하는 고위직 귀족들과 친교를 맺을 기회가 많았다. 

 

 

 

 


 비발디는 1678년 3월4일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의 바이올린 주자였던 조반니 바티스타 비발디(Giovanni Battista Vivaldi, 1655~1736)와 카밀리아 비발디(Camilia Vivaldi, 1653~1728) 사이에서 칠삭둥이로 태어났다. 살면 얼마나 살까 싶어 세례도 미루다 용케 목숨이 붙어 있기에 2개월 뒤인 5월6일에야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비발디는 4남4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산 마르코 성당은 아주 풍부한 전통을 지닌 음악학교였고 동시에 새로운 경향의 음악 탄생지이기도 했다. 비발디는 어린 시절부터 진취적인 아버지에게서 근대적인 교육과 음악의 기초 및 바이올린 지도를 충분히 받았고, 이것이 나중에 그가 바이올린의 대가 및 작곡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비발디는 15세 때인 1693년 9월18일 산 마르코에서 가까운 올레오에 있는 산 지오반니 수도원에 입회하여 25세 때인 1703년 3월23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몸이 섬약했던 그는 집에서 출퇴근하는 배려를 받았는데 그의 유전적인 빨강머리 때문에 '붉은 사제(Il Prete Rosso)'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이것은 "비발디를 스페인의 투우장에 보내면 힘들게 붉은 헝겊을 휘두를 필요없이 머리털만 들이대면 소하고 좋은 대결이 되겠다." "붉은색 머리는 악마의 머리다." 등 온갖 조롱과 멸시의 대명사가 되었다. 


 1703년 9월, 비발디는 베네치아의 여자 고아원 겸 음악학교인 피에타 양육원(Pio Ospedale della Pieta)의 바이올린 교사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1740년까지 합주장(合奏長)•합창장을 역임하면서 학교 관현악단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나라를 순방하면서 많은 작품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음악활동을 하였다. 


 그 시대에는 기악 연주 등 음악 교육 과정이 여성들에게는 개방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피에타 양육원의 여학생들은 한편으로는 비발디를 통해 수준 높은 음악 교육을 받고, 또 한편으로는 여가 선용, 결혼 가능한 기회를 충족시키거나 수녀원 생활을 준비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다만 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일반 대중' 앞에서 연주하지 않겠다는 동의가 절대로 필요한 과정이었다. 당시에는 여성이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목회자로서의 위치를 차지할 수 없었으므로 자선 음악회나 교회 현악부에서 연주 활동을 하며 기부금을 벌어오는 등의 역할에 한정되었다. 


 장면은 바뀌어 보조신부인 안젤로(스테파니 코디롤리)와 함께 베네치아의 곤돌라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비발디. 배경음악은 '사계' 중 겨울. 부모님과 두 누이동생이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덴마크 국왕의 무도회에 초대받았다고 말하자 지극정성으로 비발디를 위하는 어머니(클라라 보라스)와 아버지(장 클로드 르카)는 기뻐하는데, 여동생 마가리타 가브리엘라(1680~1750; 멜리사 메르탕)와 자네타 안나(1687~1762; 델피느 드파르디외)는 오빠에 대한 부모님의 편애 때문에 불만이 많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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