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BC
추천업소
추천업소 선택:
추천업소 그룹 리스트
  • 식품ㆍ음식점ㆍ쇼핑1
  • 부동산ㆍ건축ㆍ생활2
  • 미용ㆍ건강ㆍ의료3
  • 자동차ㆍ수리ㆍ운송4
  • 관광ㆍ하숙ㆍ스포츠5
  • 이민ㆍ유학ㆍ학교6
  • 금융ㆍ보험ㆍ모기지7
  • 컴퓨터ㆍ인터넷ㆍ전화8
  • 오락ㆍ유흥ㆍPC방9
  • 법률ㆍ회계ㆍ번역10
  • 꽃ㆍ결혼ㆍ사진11
  • 예술ㆍ광고ㆍ인쇄12
  • 도매ㆍ무역ㆍ장비13
  • 종교ㆍ언론ㆍ단체14

 

종교개혁 500주년 ― 세상을 바꾼 획기적 사건

 

 

(지난 호에 이어)
 루터의 대답은 계속된다. "2부에 담긴 내용은 그릇된 교리와 전•현직 교황의 고약한 행실을 꼬집는 겁니다." 그 때 '그만!'하고 카를 황제가 말을 막자 참석자들이 일제히 '옳소!'하고 외친다. 그의 연설은 이어진다. "교황의 칙령과 사람이 만든 교리로 인해 신자들의 양심은 비참하게 뜯겨졌고 유린됐습니다. 이 책들을 부정하는 것은 폭정에 힘을 보태는 꼴에 지나지 않으며 쌍수를 들어 신성모독을 환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듣던 알레안드로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습니다.'하고 황제에게 속삭인다. 


 "3부는 로마의 학정에 빌붙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북돋우려는 제 노력을 비난한 자들을 겨냥한 글입니다. 솔직히 아주 노골적으로 썼죠. 저 역시 인간이므로 실수는 합니다. 성서에 비추어 제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주장을 철회하고 책은 모조리 불사르겠습니다." 

 

 

 


 그 때 알레안드로가 고함을 친다. "그대는 아직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며 "카톨릭교회가 규정한 사안에 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모두 관행으로 굳어졌다. 예배, 수도회 규율, 완벽한 입법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의무, 순교자들의 피로 지켜낸 서약 등 마땅히 따를 것들인데 논쟁하느라 시간만 낭비했다. 이제 답하라!" 

 

 

 


 이 때 프리드리히 선제후와 멘토인 슈타우피츠 신부의 긴장된 얼굴이 오버랩되며 루터의 연설은 계속된다. "폐하와 여러 각하들께서 간단한 답을 원하신다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자기모순에 빠지기 일쑤인 교황과 종교회의에 의한 판결이 아니라 보편적 이성과 성서에 근거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제 양심은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다는 뜻입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부당하거니와 편치 않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달리 도리가 없겠지요. 하느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註: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은 루터가 보름스 국회에 죽음을 무릅쓰고 출두한 일을 유럽 역사상 최대의 장면이며, 거기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 장면을 인류의 근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지옥 그 자체에 정면으로 도전하고자 했던 루터의 행위는 두려움 없는 최고의 용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윽고 카를 5세 황제는 보름스 칙령을 통해 루터를 '법에서 추방된 자'라고 선언하였다. 이제 법적으로는 누가 그를 살해한다고 해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을 것이었다. 이를 간파한 프리드리히 현자는 선수를 쳐서 비텐베르크로 돌아가던 루터를 위장 납치하여 아이제나흐(Eisenach)에 있는 바르트부르크 성(Wartburg Castle)에 숨긴다. 


 여기서 루터는 가명으로 10개월 간을 지내며 '강제된 휴가'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았다. 이때 그가 번역한 독일어 성서는 독일 기독교인들을 교회의 권위에서 해방하고, 독일어 발전에 이바지한 신학적, 언어학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독일 종교개혁 이전에 사용된 성서는 라틴어 성서였으므로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만이 읽을 수 있었는데, 성직자들은 이를 악용하여 신자들을 자신들의 목회적 필요에 따라 조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루터가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고지(高地) 독일어로 내용 및 언어가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대하듯이 번역함으로써 독일 기독교인들은 성직자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성서를 읽고 그들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522년 9월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9월 성서'로 불린다. 또한 루터가 성서 번역에 사용한 고지 독일어는 현대 표준 독일어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성서 번역은 독일어의 문법이 통일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註: 구약성서의 번역은 1534년에 완성되었다.]


 한편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머물고 있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루터가 죽은 줄로 알고 그의 대학 동료인 카를슈타트 교수가 위대한 평등사회를 만들겠다며 교회를 무력으로 개혁하려고 하였다. 필리프 멜란히톤(라스 루돌프)이 "루터는 개혁을 부르짖지만 교수님은 반역을 원하십니다."고 말리지만 그는 "일을 완수할 배짱이 없다면 가만 있게나. 아니면 스스로를 낮추든가"하며 막무가내다. 


 그는 '민중의 뜻'이라며 농민들을 부추겨 루터의 뜻을 왜곡하여 반란의 우두머리로 소요를 일으킨 것이다. 이 때 평신도에게는 거부되었던 빵과 포도주가 제공되는 한편 카톨릭 미사를 거행하던 수사들은 돌에 맞아 죽고, 성상들은 교회에서 파괴되거나 불태워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루터는 믿음의 일로서 시작한 자신의 일이 오해받고 위협 당하고 있다고 느끼자, 1522년 3월 6일 자신의 망명지를 떠나 비텐베르크로 돌아와 교회에서 8일간 연속해서 설교하였다. 


 "나는 어느 누구도 폭력과 피흘림을 가지고서 복음을 위해 싸우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말씀을 통해 세상은 정복되며, 말씀을 통해 교회는 구원받으며, 말씀을 통해 교회는 부흥한다.… 요약하여, 나는 말씀을 설교하리라. 나는 말씀을 말하리라. 나는 말씀을 적으리라. 그러나 나는 어느 누구도 강제하거나 강요하지는 않으리라. 믿음은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지 강제되거나 강압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말씀만이 일을 해야 한다는 그의 원칙을 천명한 것이지만 펜과 혀로 싸우는 신학자였던 루터는, 이제 정치적 권력을 얻기 위해 복음의 이름으로 칼을 손에 쥔 농민들의 반란을 결국 군주들에게 군사 행동을 촉구하여 진압함으로써 비로소 질서와 안녕이 복구되었던 것이다. 이 농민반란으로 약 10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WWW.AHAIDEA.COM
4065 CHESSWOOD DR. NORTH YORK, ONTARIO,M3J 2R8, Canada
[email protected] | [email protected]
Ahaidea
캐나다 daum.ca와 대한민국 daum.net은 관련성이 없습니다.
Copyright © 2024 AHAIDEA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