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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헌화가(老人獻花歌)

 

 

 자줏빛 바위 가에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시애틀 남쪽에서 바라본 레이니어 산.

 

 

노인헌화가는 삼국유사에 나온다. 약 1300년 전 신라의 향가다. 성덕왕 시절 강릉 태수가 수로부인과 함께 부임길에 나선다. 부인은 미색이었다. 용왕이 납치해 갈 정도다. 일행은 바닷가를 따라 북상한다. 아마 부인도 말을 타고 이동 중이었나 보다. 얼핏 앞산의 산봉우리가 온통 자줏빛이 아닌가. 철쭉꽃이 만발하고 있었다. 부인은 고삐를 잡아 당겨 말을 스톱 시킨다.


“여봐라. 저 꽃을 꺾어다 내게 바치거라.”


“마님. 불가하옵니다. 번지 점프하다 두개골이 온전치 못할 것이옵니다.”


“배은망덕한지고. 언제까지 너희들은 내 미모를 공짜로 관람하겠다는 거냐? 저 꽃을 손에 쥐기까지는 여기서 이대로 밤을 샐 거니까 그리들 알라.” 


이때 짜잔 나타난 게 노인이다. 암소를 끌고 가다가 수로부인의 멘트를 엿들은 것이다. 초라한 행색의 노인은 먼저 향가를 한 수 읊는다.


금혼기념으로 밴프에서 밴쿠버까지 렌터카로 드라이브를 했다. 시애틀도 들렸다. 당일치기다. 레이니어(Rainier)산을 보고 싶었다. 부두에서도 저 멀리 산이 보인다. 눈에 덮인 정상이 지평선 위에 외롭게 떠 있다. 
이번 여행의 주제는 산이다. 산다운 산들이다. 로키의 산들에다 레이니어 산까지 추가한 연유다. 명성 하나 때문에 왕복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이건 대책 없는 노인이 아닌가. 하지만 레이니어 산은 낮은 산이 아니다. 자그마치 4천4백 미터이니 백두산보다 1배반 이상 높다. 


시애틀도 사람들이 꼬이는 곳은 부두다. 거기 피시 마켓이 있다. 진열해 놓은 어류들은 거의 점보 사이즈들. 점보 바다가재, 점보 조개 그리고 알라스카 킹 크랩은 다리 하나가 어른 팔뚝만 하다.
인근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간이음식점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식사도 추억의 아이템이 아닌가. 금혼여행이니 식당도 업그레이드했다. 크랩 요리를 하는 식당을 일부러 찾은 것이다. 역시 손님들 차림도 달라 보인다.
놀란 것은 입구에서 좌석 배정을 하는 여성. 마네킹처럼 퍼펙트하게 빚어진 얼굴이 아닌가. 그런 고혹적인 여성을 본 것이 언제였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레이스 켈리는 물론 아니다. 하지만 나탈리 우드와는 견줄 만하다.


정작 실수는 두 번째 그녀 앞을 지나갈 때 일어났다. 미터 파킹을 하고 들어 가면서 “What a beautiful lady! (대단한 미인이세요!)”하며 지껄인 것이다. 그리곤 느닷없이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후회가 먹구름처럼 엄습한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고객이 종업원보고 예쁘다고 말해서 문제될 게 뭐 있겠는가. 그녀도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와는 아무 상관없는 나 자신의 문제였다. 그런 말을 내가 해도 좋을 사람인지 갑자기 정체성의 혼란이 일어난 거였다. 


“나 같은 행색의 노인이 그런 칭찬을 하면 젊은 여성이 반기기는커녕 혐오감을 갖게 되는 거 아닐까?”하는 의심이 쓰나미 현상을 일으킨 거였다.


아, 그랬구나. 신라의 노인도 그래서 향가를 불렀구나. 미모의 수로부인에게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 양해를 먼저 구한 다음 스파이더맨이 돼 절벽을 올라갔구나. 


어느 날 문득 하나씩 깨우치는 게 인생의 여로라는 말인가. 시애틀에서 북상하는 5번 도로에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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