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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유니스 윤경남 옮김

 


(죠반니노 과레스끼 삽화-수용소 안에서)

 

 

(지난 호에 이어)
“종탑에 달런 저 종들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 안내자가 우리에게 말했다.


“그런데 왜 종은 울리지 않나요?”


“독일이 점령한 그날부터 종들은 일제히 침묵을 지켜왔지요. 폴란드가 해방이 될 때까지 다시는 울리지 않을 겁니다.” 안내인은 숨을 죽인 채 말했다.


우리 포로들이 시가지로 다시 열 지어 내려갈 때 나는 그 종들이 벙어리가 된 4년이란 세월을 생각해 보았다. 폴란드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소리를 나는 다시 들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10월 31일 독일인들이 우리에게 나누어준 러시아 포로들의 코트는 대부분 가슴이나 등에 꿰맨 조각이 있다. 그 작고 둥근 조각은 총알이 들어가고 영혼이 빠져 나온 구멍을 메우고 있었다. 


내 코트는 바로 가슴 위에 그 헝겊 조각을 대고 있다. 튼튼한 헝겊으로 단단히 꿰매놓았다. 그런데 바람 없고 햇빛이 따뜻한 날씨인데도 찬 공기가 그 헝겊조각으로 스며들고 있다.

 

 

나의 후손에게 주는 두 번째 편지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첫 번째 편지에서 나는 어느 화창한 아침에 어떻게 체스토효바(Czestochowa)에 있는 노드 카젠느(Nord-kaserne) 강이 보이는 뜰에 서있게 되었나 네게 설명해 주었으니, 오늘은 내가 무엇을 타고 그곳에 갔는지 말해주겠다.


1943년 9월 8일 저녁이었다. 라디오 방송이 갑자기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고 방송하더구나. 다음날 아침에야 그게 사실이었음을 알았단다. 같은 막사에서 잠이 깨었는데, 우리를 감시하는 경비병이 종전과 달라졌다. 군복도, 무기도, 어쩌면 국 적까지도 말이다. 다시 말해서 독일은 항복한 것이다.


“그러면 영웅적인 최후 방어는 어떻게 된 건가요?”하고 너는 묻겠지. 얘야, 아주 기막히게 극적인 이야기를 하나 해주마.


우리는 포위되어 숨을 죽이고 공격할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트럭 앞에 25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었지. 병참부에 보냈던 상병이 돌아오기에 물었다. “수류탄을 몇 개나 가져왔냐?”


“하나도 못 가져왔습니다. 정식으로 청구하지 않으면 핀 한 개도 내줄 수 없다고 소령께서 말했습니다. 곤란한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답니다.” 상병이 말했다.


“좋아! 그럼 소총 탄약통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이 몇 개인가?”하고 나는 물었다.


“한 사람 앞에 한 줄은 돌아갑니다.”


“됐다! 우린 아껴서 써야만 한다. 저들 눈의 흰자위만 겨냥하라!” 나는 소리쳐 말했다.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저들은 탱크 속에 있는걸요.” 다른 병사가 내게 말했다.


“그럼 탱크를 겨냥해라! 그밖에 다른 말이 필요한가? ”

 

     * *

 

지나온 이야기는 이쯤 해두자. 자세한 설명은 모두 끝났지만 우리의 고통은 이제부터 시작임을 알아다오. 정오가 되자 사병들은 도시 외곽으로 이동되고, 장교들은 식당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커다란 독일 탱크가 우리 눈앞에서 그 식당을 덮치고난 다음엔 보병들이 부엌까지 몰려 들어왔다. 우리는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이층에 있는 클럽 회원 방으로 피신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날 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셈이다. 내 발뒤꿈치에서 찰칵 소리가 나기를 기다리던 그 대령은 소령과 나란히 당구대 위에 사지를 뻗은 채 누워 있었다. 불쌍한 대령 같으니라고! 


대령이 잠잘 때 탄호세에 나오는 행진곡에 맞추어 코를 골던 생각이 나는구나. 과거의 위대한 우리 동맹국 천재 음악가에게 밤의 찬사를 보낸 일은 용감하고 의미 있는 행동이었지.


나는 그랜드피아노 위에서 잠을 자며, “두 명의 근위병”이라는 하이네(Heine) 의 시(詩)를 밤새도록 꿈꾸었다. 다음날 S.S.(친위대) 장교와 활발한 토론이 있은 다음, 우리는 써타렐(Citadel)로 이동하게 되었다.


“씨타텔요? 무얼 하는 곳인데요? ”하고 너는 묻겠지. 자, 이런 걸 상상해 보렴. 옛날에 어떤 건축가가 군인의 도피처와 무기 저장고를 만들려고 요새화된 설계도를 고안해 놓았단다. 고도의 기능과 상식을 발휘하려고 그는 무척 고심했단다. 그런데 다음에 일어난 일들을 또 상상해봐라. 그 건축가가 먼 곳을 다녀와야 했는데, 그가 집을 비운 사이에 그의 애견이 그 청사진을 발기발기 찢어 놓았단다. 


하녀는 그 재난을 감추기 위해 찢어진 조각들을 주워 모아 아무렇게나 붙여 놓았지. 건축가가 돌아와 일이 돌아간 꼴을 보며 하는 말, “정말 아무 상관 없다고.” 하드란다. 그는 그 청사진을 국방성에 보냈는데, 국방성은 그 설계도를 열렬히 지지해 주어 인정을 받고 계약단계까지 갔다. 그리고는 준공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Citadel(성채)이다. 이제 너는 그 성채를 구경한다든가 군사 시설을 돌아보게 되면, 왜 그렇게 지어 놓았는지 이유와 목적을 알게 될 것이다. 너는 위쪽에 문이 달란 삼각형의 피라미드 방을 지나게 될 것이며, 천장에 붙은 세면실 달린 화장실, 긴 낭하로 열려있는 발코니, 빈 공간과 연결되어 3층까지 서 있는 높은 문짝, 굴뚝 속에 박혀있는 수도 파이프 같은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1932년 8월쯤 나는 P성채에서 이상한 복장에 긴 턱수염을 늘어뜨린 군인을 만났단다. “몇 년도에 입대했습니까? ”하고 그에게 물었다.


“1899년이죠.” 그가 대답했다.


“아직 복무 중이오? ”


 “아닙니다. 1 904년에 제대했지만요 나가는 길을 찾을 수가 있어야지요…”


A성채도 이와 똑같단다. 그러나 운 좋게도 우리는 길을 잃기 전에, 이삼 일 정도 지나서 라게르(Lager) 수용소로 끌려갔단다. 그곳이 훨씬 나은 곳이지. 


그렇다, 사랑하는 아들아! 하느님이 모든 성채로부터 너를 보호해 주시기 바란다. 첫째, 성채 벽은 모두가 무섭게 교육적이란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벽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있다.


“모험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리라! 믿으라, 순종하라, 투쟁하라! 옳건 그르건, 나의 조국이여! 보다 높은 목표를 향하여!”


조그마한 칸막이로 나뉘어진 아름다운 지점에 이르자 큰 글자로 이렇게 쓰여있는 게 보였다. 


“달 • 려 • 라 !” 비상사태에 이르렀을 때의 긴박함을 생각하면서 그 이상 물어볼 수도 없었다.


A성채 안에서 나는 재미있는 일을 많이 목격하게 되었지, 예를 들면 독일산 말을 처음 사귀게 된 일이었다. 그 말은 위엄이 있고 호전적이었다. 큰 눈망울과 의기양양한 태도는 시대의 중요성과 자기에게 배당된 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범 유럽적으로 말들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그의 할 일처럼 보였다. 말은 쇠와 주철로 만든 특수한 작은 마차에다가 복잡한 마구가 달려있었다. 그 마차는 여러 개의 바퀴와 지렛대와 페달과 손발로 움직이는 브레이크가 장치되어 있어서, 보는 사람들은 그 마차가 액셀레이터와 클러치와 기어까지 있으리라고 생각할 지경이었다. 


마구를 보고 놀란 것은, 구멍에 매여있는 수많은 가죽 끈마다 개별적인 번호가 붙어있다는 사실이었다. 비천한 말을 기계화한 것이 성공한 사례처럼 보였다. 말의 허리통은 너무 바짝 조였기 때문에 발레리나의 허리처럼 가늘었다. 


반면에 엉덩이 띠는 7~8인치씩 길어서 꼬리 밑에 늘어져 있었다. 허리 띠는 27 번 구멍에, 엉덩이 띠는 1 2번 구멍에 매두는 것이 독일식 규정임이 틀림없었다. 그 착한 동물은 그런 일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의 어미 말이 그런 표준에 맞추어 생산하지 못한 것을 약간 부끄러워 하는 듯이 보였다.


만일 말의 하느님조차 그에게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면, 그 말은 자기 허리 치수를 줄이고 꼬리는 엉덩이에 닿도록 6인치 낮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이 틀림 없었다.

 


    * *

 

내가 A성채에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는가 하는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느 날엔가 밖으로 나와 알프스 북쪽으로 가는 기차를 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때 나의 낡은 자전거도 마지막 이별을 고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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