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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yoon
(포토에세이)자연의 모자이크를 따라서-풍운아 윤치호의 諧謔해학
knyoon

 

 

유머나 해학(諧謔)은 얼핏 보면 재미 있는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희극의 가면 뒤에 비극이 숨어 있듯이, 해학은 재미 이상의 풍자와 비판을 통해 웃음을 자아내는 고차원의 문학형태이다.

2015년 10월11일 오후, 캐나다한국일보 도산아트갤러리에서 열린 필자의 출간기념회 작품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 속의 주인공, 그리고 이상묵씨가 슬라이드로 소개한 ‘시대를 앞서간 지성인,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님’의 인생에 해학이 담겨 있다. 

남감리교회를 한국에 도입한 인연으로 토론토감리교회의 석동기 목사님이 진행해 주시고, 소창길 목사님의 역사적인 평가와 맞물려, ‘오 캐나다’와 우리 애국가를 토론토 3테너-(김명규, 유종수, 민석홍)의 선창에 이어 축하객들도 4절까지 함께 불렀다. 손님으로 참석한 샌자일스 장로교회의 Tim 목사님 일행은 그 힘찬 우리나라 애국가에 완전히 감동하고 말았다고 한다. 

문화유산의 가치가 돋보이는 61년에 걸친 ‘윤치호 영문일기’의 역사적 의미를 토론토영락교회 송민호 목사께서 말씀해 주셨고, 특이한 각도로 윤치호 선생님의 여성 관심사를 조명한 한호림 님의 달변이 아가서를 들려주는 듯했다. 

이 작품 속에서 서양의 관례를 모르는 민영환 공에게 윤치호 선생이 설명하는 장면을 민영환 공의 후손, 민혜기 님이 그 당시의 아이러니를 조근조근 설명하였다.

무엇보다 한인뉴스 주간지에 1년 가까이 “애국가의 작사자는 윤치호”를 연재해 주신 이용우 사장님의 ‘애국가’ 관련 질문에 민석홍 장로의 진실을 밝히는 답변으로 분위기를 숙연케 했으나, 가족들이 부른 ‘즐거운 나의 집’ 합창과 친지들이 보내주신 꽃다발 속에 하느님의 은총을 기리는 아름다운 기념회가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그리스도인 정치가인 윤치호는 그의 영문일기를 통해 풍부한 문학성이 깃든 해학을 보여준다.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에 나오는 아이러닉한 표현 하나.

 학부협판인 윤치호가 민영환 특명전권공사를 수행하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을 때의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숱한 일화 중의 하나가, 1896년5월 24일 일기에 나온다. 

“모스크바, 비 오다; 대관식이 열리는 도미션 대성당은, 러시아의 황족, 고위 성직자들과 외국사절들 외에는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교회이다. 그 교회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모자를 벗어야 한다… 민영환 공은 조선동방예의지국의 예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잠깐이라도 갓(사모紗帽)를 벗어야 한다는 의례를 완강하고 단호하게 끝내 거부했다…. 나는 민 공이 마음을 바꾸도록 간곡하게 설득해 보았다.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상감의 어명을 받들고 대관식에 온 사람임을 강조하고, 잠시 동안만 그 고루한 조선관습을 접어두는 일이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님을 재차 간청했다. 

 ‘그래도 난 안 들어가!!’ 민 공은 고집 센 당나귀보다 더 완강했다…”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다녀온 후 윤치호는 개성에 남감리교회가 주도하는 한영서원을 설립하여 현실적인 산업교육을 장려한다. 그 외에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 교장으로, YMCA 회장, 연희전문학교 교장과 이화여전 이사로 활동한다.

1935년, 정동에 있던 이화여전을 신촌에 새로 석조 건물을 짓고 이전할 때의 유머러스한 일화가 있다.

  “이화학당은 1885년에 북감리교 여선교사 스크랜턴 부인에 의해서 처음으로 개설되었고, 이화학당이란 이름은 명성황후가 지어 준 것이었다.

 1888년 정동의 작은 기와집에서 단 일곱 명의 학생을 데리고 시작한 이화학당을 1920년에 근대식 양옥에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여학교로 만든 것은 역시 북감리교의 여선교사였던 미스 프라이였으며, 그것을 다시 1925년에 전문학교로 확장하고 1935년에는 신촌에 대규모의 석조 건물을 지어 오늘의 이화대학으로 만든 것은, 감리교의 초대목사로 정동교회와 배재학당을 창설한 아펜젤러 1세의 따님인 미스 앨리스 아펜젤러의 노력과 헌신에 의한 것이었다.

 

 

이화학당의 새 건물(현재 본관 파이퍼 홀)을 짓는 데 아펜젤러 교장의 비상한 노력은 다시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집을 직접 설계하고 건축기금까지 얻어온 스와인하트 선교사의 공적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런데 건물은 완성되었으나 내부의 장식과 비품을 마련하자면 돈이 더 필요하므로 스와인하트 씨에게 다시 한 번 미국에 가서 기부금을 더 얻어달라고 졸랐으나 미국도 기부금을 얻기가 매우 어려워졌다고 잘 듣지를 않았다. 그래서 이화의 김활란 박사는 윤치호 선생을 앞세워서 각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사회단체가 주관하여 스와인하트 씨에 대한 위로와 감사회를 베풀고 다시 한 번 미국에 다녀오도록 격려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수일 후에는 종로3가에 있던 명월관에서 스와인하트씨에 대한 감사와 오찬회를 베풀게 되었다.

그날은 몹시 더운 여름날이었는데, 백여 명의 각계 대표와 언더우드 박사 이하 미국인 남녀들도 많이 왔었다. 주빈석에는 스와인하트 씨가 앉았고 주인석에는 좌옹 윤치호 선생이 좌장으로 앉아 있었다. 

   이윽고 연회가 시작되자, 만당의 박수 소리와 함께 좌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스와인하트 씨가 미국에서 기부금을 얻어온 덕택으로 우리 이화의 새 교사가 완성된 것을 자축하고 스와인하트 씨의 수고에 대해서 감사를 하자는 것인데, 이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나는 한국의 고유한 옛날 이야기를 하나 하려고 합니다.”

 

좌옹은 고상하고 우아한 영어로 나직한 목소리로 차근차근하게 말하는 것이 마치 무슨 음악이나 듣는 것 같았다.

  “조선조 시대의 어떤 어진 임금님이 정치를 하던 때의 일입니다. 그 임금님은 마음이 착해서 자나깨나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걱정하여 틈만 있으면 벼락 거동을 잘 다녔는데, 하루는 거동 행차가 동대문 밖을 나서서 어떤 시골 고을에 당도하니, 화광이 충천하고 군중이 아우성을 치는 것이 공기가 매우 수상하였습니다.

거동행차를 멈추게 하고 사정을 알아보게 하니, 그 고을의 군수가 너무 노략질을 하므로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킨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임금님이 크게 노하여 신하를 보고 당장에 그 놈을 잡아오라고 하니, 미구에 광 속에 숨어 있던 군수가 왕의 앞으로 끌려왔습니다.

 

  ‘여봐라, 군수란 백성의 부모와 같은 것인데, 얼마나 백성을 들볶았기에 이지경이 되었느냐?’ 임금이 꾸짖으니 땅에 엎드려 대죄하고 있던 군수는, ‘예, 죽을 죄를 지었사오나 소인에게는 한 가지 사정이 있사옵니다.’ 

 ‘대체 너의 소위 사정이란 무엇이란 말이냐?’

 ‘다름이 아니오라 소인에게는 딸이 다섯이 있사온데, 그 딸들을 시집 보내려면 돈이 이만저만 들지를 않고 전하가 주시는 국록으로는 태부족이므로 백성의 재물을 조금 긁었더니 그만 이 지경을 당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임금의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그때 그 임금에게도 딸이 셋이나 있어서 그 딸들을 시집 보낼 생각을 하면 한 나라의 임금인 자기로서도 걱정이 되는데, 하물며 한 작은 고을의 수령쯤으로 딸이 다섯이나 된다니 오죽이나 걱정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왕은 노여움을 푸시고,

 ‘네 죄는 처벌 받아 마땅하나 정상이 딱하니 특히 용서하겠다. 차후에나 조심하여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좌옹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소리를 높여서,

 “그런데 우리 이화학당에는 딸이 수백 명이나 됩니다. 그 애들을 잘 공부시켜서 시집을 보내자면, 돈을 이만저만 긁지 않고서는 아니되겠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어렵더라도 스와인하트 씨는 다시 한 번 미국에 다녀오셔야 되겠습니다.”

 박수 갈채가 우레같이 일어났다. 얼마나 적절한 비유이고 재미 있는 이야기냐? 어떤 선교사 부인은 ‘딸 가진 부모의 걱정은 동서양이 같군요’라고 연방 그 이야기를 수첩에다 적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날 좌옹의 재치 있는 이야기가 주효했던지, 드디어 스와인하트 씨는 미국으로 다시 가서 많은 기부금을 얻어왔으며, 그 결과로 지금의 이화대학 건물이 그 내부 장식까지 완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윤치호의 생애와 사상;윤치호문화사업회선집1호> 

 

어두운 세상에서도 기지를 발휘하여 학교의 발전을 도운 멋진 해학의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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