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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禪으로 성경을 읽다-인간의 본질(9)
kimbokyung

 

 

 (지난 호에 이어)
그러나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에서 몸소 보이신 그 행적에 일치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본다면 비록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경우처럼 좋은 이웃이 되는 사람은 오히려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큰 칭찬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란 것은 분명하다.


 예수님께서도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를 물어 온 청년에게 “나를 믿어라”는 말씀보다 “가서 너의 가진 것을 모두 팔아 이웃에게 나누어주라“고 말씀하셨다. 구원의 조건은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 즉 ‘이웃사랑’에 있음을 암시하신 것이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의 생각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에 있다. ‘아담과 이브가 왜 에덴으로부터 쫓겨나게 된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을 지적한다. 우리가 이방인이니 유대인이니 기독교인이니 불교신도니 동양인이니 서양인이니 흑인이니 백인이니 하는 것이나 “하나님”이니 “천주님”이니 “예수님”이니 하는 것도 인간의 생각으로 임의로 붙인 명칭에 불과하다. 


이러한 명칭이나 경계에 집착되어 있는 한,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에 의하여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고 “밝아진” 그 눈, 그리고 그들이 에덴으로부터 쫓겨나게 된 바로 그 “선과 악을 알게 된 그 지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지 못한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 인간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관계로 아직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라 말씀하시고, 또한 사람을 자신의 몸,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의 몸이 성전이 되고, 사람의 몸이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본심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그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면 예수님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제사장이나 래위 사람보다 더 온전한 사람으로 칭찬하신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섬기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하는, 그 본의 역시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온전한 신앙에는 명칭에 구애 받지 않음을 뜻한다. 하나님은 밖이 아니라 내면을 보시고, 잎이 아니라 열매를 보고 심판하신다. 


창세기로부터 인간의 지식을 에덴을 잃고 또한 고통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원인으로 지목하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성전이나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로 비유하시거나 바울 사도가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라는 말씀으로, 지금 우리가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복 일깨워주고 있지만 정작 그렇게 자신을 버리는 방법에 대하여 교회는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기독교에서처럼 인간이 속한 사회나 우주자연을 유기체 또는 거대한 “그물(網)”로 보고 있는 불교는 수행의 궁극적 목적을 견성(見性), 즉 자신의 본성을 “지식의 어두운 그림자”의 방해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것에 두고 용맹 정진한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이란 곧 사람의 몸이 곧 성전이 되는 것이나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로서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 즉 무아(無我) 또는 공(空)의 지혜를 회복하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한 인간의 마음이나 행동을 학습의 결과로 보는 심리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담과 이브가 “지식의 열매”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부끄러움을 알게 되어 치마를 해 입었다는 것이나 하나님이 두려워 숨었다고 하는 행동의 변화는 탈학습 또는 소거 또는 치료의 대상이 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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