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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bokyung
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1)
kimbokyung

 

선(禪)으로 성서(聖書)를 읽다(1)

 

“우리가 지금 에덴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면...”

 

(토론토대학교 정신의학 박사,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정년퇴임) , 한국상담학회 수련감독 전문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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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우리가 지금 에덴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면....”

 

 사람은 누구나 서로 다른 두 가지 세계에 두 발을 걸치고 아슬아슬하게 살아간다. 첫째는, 우리가 배가 고프면 먹어야 되고, 갈증이 나면 마셔야 하고, 또한 피곤하면 자야 하는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는 한 순간도 피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자연과학의 대상이 되는 실제적 또는 현실적 세계고, 둘째는 개개인이 이전 경험을 통하여 학습한 마음으로 지각하고 판단하는 주관적 또는 가상적 세계다.

 

 이 두 가지, 현실과 망상의 세계는 서로 충돌한다. 그 예로 우리가 망상을 일으키게 되면 배가 고파도 먹을 수 없고, 피곤해도 잘 수 없게 된다. 그것은 곧 고통과 죽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살고 있는 이 땅을 고통의 세계, 죽음의 세계로 지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이 실은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위하여 예비하셨던 그 에덴동산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인간이 그것을 저주의 땅,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땅, 그래서 이 땅 위에서 산다는 것은 괴롬과 고통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 그 자체 때문에 실은 이 땅이 낙원인데도 낙원으로 보고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일으켜 볼 수도 있다.

 

 동일한 환경도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지각하고 해석하는가에 따라 개인의 현실경험도 다르게 된다는 것 역시 진리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에서 아담과 이브가 에덴으로부터 쫓겨나게 된 것은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열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 이제는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여 무화과 나뭇잎을 따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고 하는 것이나 하나님을 바로 보기 두려워 나무사이에 숨었다고 하는 ‘의식의 변화’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에덴동산을 에덴동산으로 그 이상 향유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밝히는 동시에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역시 태초의 에덴과 다름없지만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어리석음으로 에덴을 에덴으로 볼 수 없게 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특히 예수님이 세상에서 보여 주신 행적을 통하여 증명하고자 한다.

 

 이 글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는 우리의 몸과 같은 유기체로, 유기체에 속해 있는 부분들이 어떤 차별도 없이 서로 소통하여 서로 의지하고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아담과 이브처럼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 “밝아진 눈” 즉 모든 것을 자타나 내외나 선악이나 귀천이나 미추로 분별하게 됨에 따라 우주 또는 자연의 법칙,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법에 어긋나는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됨에 따라 잃어버리게 된 낙원을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며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숨으로 생기를 얻게 된 아담, 인간의 본성을 되찾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에 궁극적 목적이 있다.

 

 만일 우리가 지금 에덴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결코 저지르지 않아야할 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한 것과 조금도 다름없는, 선악이라든가 귀천이라든가 주종이라는 분별망상을 일으키지 않아야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망상을 일으키는 순간 에덴은 변하여 지옥이 되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선 사상과 선 수행법을 인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선 수행 역시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소위 “눈이 밝아짐”으로써 잃어버린 인간의 참 지혜를 되찾는다고 하는 견성(見性)에 목적이 있는 것과, 견성을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개발된 선 수행법을 기독교에서도 적용할 수 있으리란 것 때문이다.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기독교이든 불교신자든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동일한 아담의 자손으로서 그 본질에 있어서는 한 치의 차이도 없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기독교와 불교가 동일하게 인간의 지식이나 논리가 한 몸에 속한 지체로서 서로 의존하며 사랑하게 되어있는 인간의 본질을 방해하게 된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유대’이니 ‘사마리아’이니 ‘불교’니 ‘기독교’니 하는 것은 인간이 임의로 붙인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그러한 분별 자체가 인간의 본질을 깨닫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방해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 예수님이 ‘착한 사마리아인’을 ‘참이웃’으로 칭찬하신 것처럼 명칭이 아닌, 행동이 그를 소위 ‘그리스도인’을 만들 것이다.

 

 이 글에서 반복 묻는 것은 예수님이 “너의 몸은 곧 성전”이라고 하신 것이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신대로, “나의 몸이 곧 성전”이 되고, “내가 곧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되고자 한다면, 내가 나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과 질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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