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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gheesoo
영불 갈등의 캐나다 역사(1)
chungheesoo

 

서론: 퀘벡 역사의 흐름

퀘벡 역사의 흐름을 크게 구분한다면 다음의 세 단계로 구분된다. 즉 신 프랑스 시대(New France, 1534-1763), 영국식민지 시대(British Colony, 1759-1867)와 건국 시대(1867-현 시점)다.

신 프랑스 시대는 Jacques Cartier 경이 1534 년에 Gaspe 지역에 프랑스 국기를 꽂고 상륙한 시점에서 1759년에 프랑스가 7년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영국식민지가 된 시점까지. 이후 영국식민지 시대는 1867년의 건국 때가지 이어졌고, 이후부터 오늘 날까지를 건국시대로 구분한다.

한편 신 프랑스시기의 특징은 새로 발견한 영토의 개척, 이주민의 정착, 인디언들과의 전쟁 특히 영국과의 전쟁이다.

반면에 영국식민지 시대는 단일 캐나다(Unified Canada) 시대(1763-1791), 이중 캐나다(Upper Canada and Lower Canada) 시대(1791-1840), 제 2차 단일 Canada시대(1840-1867), 건국시대(1867-현시점)를 포함한다.

또한 건국시대는 퀘벡 사회개혁 전 시대(Pre-Quiet Revolution, 1867-1960), 사회개혁 시대(1960-1990) 및 사회개혁 후 시대(1990-현재)로 세분화 할 수 있다. 이러한 퀘벡 역사 흐름의 구분은 필자가 정한 구분이며 다른 학자들의 구분과는 다소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필자의 구분이 퀘벡 역사 흐름의 특징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사회개혁 전 시대(1867-1960)의 특징은 영국인과 카톨릭의 절대적 지배였다. 카톨릭은 사회 안정, 종교 보전, 불어 및 불어권 문화 보전 등을 위하여 사회 발전보다는 사회 안정을 선호하고, 영국인의 절대적 지배하에서 퀘벡인은 열등한 위치에서 빈곤에 시달리는 시대였다.

그러나 2회의 세계대전에 참여하고 교통 및 정보 기술의 보편화 등에 따라 퀘벡 프랑스인은 자기들의 열등한 위치를 깨달으며 사회 개혁을 1945-1960 기간에 준비하여 1960년에 Jean Lesage가 이끄는 퀘벡 자유당(PLQ)을 성공 적으로 시도했다.

퀘벡 프랑스인은 자신들의 존엄을 다시 찾았고, 기술적 및 지성적 능력을 확인했고, 경제적 기적을 이루었다. 사회 개혁의 핵심은 교육 개혁으로 인한 CEGEP 제도 도입 및 퀘벡 주립대 설립, 의료보험을 포함한 사회복지 개혁 및 경제 기적으로 요약된다.

필자는 퀘벡주가 어떻게 각 시대의 도전을 극복하면서 현재의 선진사회를 건설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퀘벡역사는 영불갈등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칼럼에서는 영불갈등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1 신프랑스 시대(1534-1763)

1.1 Jacques Cartier 캐나다 발견

1534년 7 월 24 일 프랑스 귀족 Jacques Cartier는 퀘벡 동쪽에 있는 Gaspe 에 상륙하여 프랑스 국기를 꽂았다. 이 순간부터 퀘벡 역사는 시작했다. 프랑스 국기에다 “프랑스 왕 만세”라는 글을 썼다. 그 지역의 원주민 추장 Donnacona는 Cartier 일행의 상륙을 반대하자, Cartier는 이것은 상륙 장소를 표시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추장을 진정 시켰다.

그 당시 벌써 스페인, 바스크 등의 어부들이 Newfoundland 해안에서 대구 잡이를 하고 있었다. 어업은 대단히 수익률이 좋았던 시기였다. 왜냐하면 카톨릭인 구라파 인들은 1년에 150일 동안 고기소비가 금지 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Cartier는 Paris로 데리고 갔던 2 명의 원주민과 함께 1535년에 다시 Gaspe로 돌아와 St-Laurence 강을 발견했으면 내륙으로 진입했다. 그는 중국으로 가는 강이라고 착각도 했다.

그리하여 Cartier는 퀘벡시를 발견하고 Montreal 지역의 Hochalaga 마을도 알게 되었다. 당시 퀘벡시는 캐나다의 중심지였다. Canada란 원주민의 단어이며 “작은 집의 집단” (amas de petites cabanes) 이라는 뜻이다.

Cartier 는 1536에 Paris로 돌아갔다가 1541 년에 Jean-Francois de la Rocque, (Roberval의 영주)의 부관으로 100여 명의 프랑스 이주민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수정(quartz)과 황철광(동, pyrite de fer)을 다이아몬드와 금으로 착각을 하면서 본국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Cartier는 퀘벡 역사에서 사라진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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