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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hyunsoo
아,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Hwanghyunsoo

 

직장 때문에 혼자 서울에서 ‘기러기’ 생활을 하던 시절, 주말마다 산엘 다녔다. 마침 친구가 동아리 산악회의 리더를 맡고 있어서 나를 매주 불러 주었다. 개포 산악회라는 곳인데, 30여 명이 버스를 대절해서 다녔다. 산을 오르는 것은 힘들었지만 정상에 올라가 느끼는 성취감은 몸의 고단함을 통해 정신적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일종의 치유였다.

 

또한 산행이 끝난 후 막걸리와 함께 하는 뒤풀이는 귀중한 의식 행위였고 어차피 혼밥을 먹어야 하는 나에게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어느 주일, 충청남도 예산에 있는 덕숭산으로 산행을 갔다. 덕숭산은 높이 495m로 산행 시간이 2시간30분 정도 걸리는데 수덕사 바로 뒤에 있는 산이다. 수덕사 주차장에서 출발해 덕숭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동안 약 100m 구간 정도만 들머리를 할 정도로 힘이 들고 나머지는 산세가 부드러워 수덕사를 보러 온 관광객들도 쉽게 찾는 곳이다.

 

그날은 일찍 서둘러 산을 내려와 수덕사를 관광하고 출발까지 넉넉한 시간이 있어 절 앞 식당에서 파전과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덕숭산의 사면 석불로 사방에 약사불,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미륵존불이 조각되어 있다.

 

그런데 잔이 몇 순배 돌아갈 즈음, 누군가의 눈길이 느껴졌다. 주위를 보니 옆에 앉아 있던 60대 말의 노인이 나를 계속 쳐다보며 무슨 말인가를 건네고 싶어 하는 눈치다. “저기…” “네…~” 이렇게 시작된 그의 말씀은 ‘당신이 지금 무척 몸 건강이 안 좋다. 무슨 병을 앓고 있느냐? 몸 관리를 안하면 큰 일을 겪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좀 더 궁금하면 시간을 내서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사실 주위에 말은 안했지만 마침 해소 천식으로 고생하고 있었기에 낯선 이에게 그런 말까지 들으니 무척 당황스러웠다. 버스 출발 시간이 다 되어 대화는 거기에서 그쳤지만 주차장까지 내려오며 계속 찝찝한 생각이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같이 있던 일행 중 한 명이 옆으로 오더니 “신경 쓰지 말아요. 이런 관광지에는 저런 사람이 가끔 있어요. 무슨 도사인 척하며 접근해 대화를 시작해 약을 팔거나 처방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하자, 한잔 얼큰하게 취한 그가 나를 위로하듯 어깨를 툭 치며 “잊어버려요” 하며 자락을 푼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흐느끼는 여인의 외로운 그림자/속세에 두고 잊을 없어/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적에/~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송춘희가 부른 <수덕산의 여승>이란 노래다. 그 멜로디는 묘한 중독성이 있었는데, 돌아오는 내내 “아 수덕사에 쇠 북이 운다”라는 가사만 계속 읊조리게 되었고, 자연히 노인과의 대화는 잊게 된다. 물론 버스에서 잔을 돌려가며 먹은 막걸리 탓도 있었겠지만…

 

<수덕사의 여승>은 1966년에 29세 송춘희가 부르지만 노래의 사연은 1930년대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시대로 돌아간다. 일제는 조선사람 중 영민한 여성을 뽑아 본국에 유학을 시켰다. 대표적 여성이 윤심덕, 나혜석, 김원주인데 이들은 귀국해 자유연애와 신여성 운동을 전개하지만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그 중 한 사람, 김원주가 이 노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김원주는 1896년 평안도 용강군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나 일찍이 친어머니가 돌아가신다. 아버지는 과부 한은총과 재혼하는데, 이때 계모가 본남편과 낳은 아들 정일형을 데리고 온다. 의붓동생 정일형은 후일 제2공화국의 외무부장관이 되는데, 그가 정치인 정대철의 아버지다.

 

 12세 때, 동생이 죽고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지만 외할머니가 보살펴 삼숭 보통고등학교를 마친다. 그 뒤 1913년 이화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운다. 1918년 이화학당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 도쿄의 일본 닛신 여학교를 다닌다.

 

일본 유학 시기부터 화가 나혜석 등과 함께 자유연애론과 신 정조론을 외치며 개화기 신여성 운동을 주도했다. 귀국 후 1920년에는 잡지 ‘신여자’를 창간하고 1921~27년에는 매일신보와 동아일보 기자로 있었다.

 

나혜석, 김명순 등과 함께 여성해방론과 자유연애론을 주장하고 여성의 의식 계몽을 주장하는 글과 강연, 자유연애 활동을 하였다. 이화학당 시절부터 기독교에 대한 회의를 해오다 1928년 예산군 수덕사에 들어가 5년 뒤인 33세에 만공스님 아래 귀의했다. 1971년에 43년의 승려생활을 마치고 76세로 입적한다.

 

▲1926년 자유연애 강연회에서 연설하는 신여성 운동가 김원주. 후일 불가에 귀의하여 일엽 스님이 된다.

 

 그녀는 일본 유학 중에 만난 친구 춘원 이광수가 일본의 여성작가 히구치 이치요(桶口一葉)의 이름에서 따와 지어준 일엽이라는 필명을 썼다. 그는 유학 중 도쿄은행장 아들인 오다 세이조를 사랑해 아이까지 낳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부모들이 결혼을 반대해 애절하게 헤어진다.

 

귀국 후 22세에 미국 유학을 다녀온 연희전문 교수와 결혼하는데 그 남편이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불구였다는 것을 첫날밤 알게 된다. 신혼 내내 악몽에 시달리는데, 이를 딱하게 여긴 남편의 요구로 결국 이혼한다.

 

그후 동아일보 기자와 동거를 하기도 하고, 독일 유학을 다녀온 유부남을 사모하는 불륜도 저지른다. 이처럼 당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이혼과 자유 분방한 연애와 사랑을 불사르다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된다.

 

일엽이 수덕사 견성암에 있던 어느 날, 14세 소년이 찾아오는데 오다 세이조와 김원주 사이에 태어난 아들 김태신이었다. 그 아들이 “어머니”라고 부르니까 일엽은 “어머니라고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고 부르라”며 내쫓는다. 참, 기구한 운명이다.

 

 1962년 김일엽의 수필집 <청춘을 불사르고>를 출간하며 이러한 사연이 알려 지는데 이 책은 이런 저런 모멘트가 겹겹이 겹쳐져 날개 돋친 듯 팔린다. 1966년에 이 사연을 김문응이 가사로 풀어내고 한동훈이 가락을 얽어 <수덕사의 여승>을 만든다.

 

“산길 천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염불 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없어/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적에/~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음악을 들으며 신체와 정신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치료법을 뮤직 테라피(Music therapy)라 한다. 불필요한 걱정이나 불안을 피할 수 있고 불편함도 예방해 건강을 회복할 수도 있다. 또한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안정감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이때 무슨 대단한 음악이나 노래를 들을 필요는 없다. 평소에 좋아하던 노래를 부르거나 들으며 그때를 회상하면 긍정적인 정서를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나에게 “아~ 아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는 바로 그런 노래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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