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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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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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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5
갈렙의 정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Give me this mountain!)

 

 성경 속의 수많은 위인들과 영웅들 이야기가 있지만 나에게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전쟁을 최후 승리로 이끈 노장 갈렙(Caleb) 장군이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인물이다. 처음 갈렙의 이름을 발견하게 된 때가 캐나다 이민 후 평생 처음으로 시작한 성경공부 시간이었다. 

 

 

 


 구약 민수기 13-14장에 나오는 이야기로 출애굽 거의 일년 반만에 모세의 인도로 이스라엘 백성이 바란 광야로 나아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땅 가나안의 접경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정탐 목적으로 각 부족에서 뽑힌 지도자 열두 정탐꾼 이야기가 나오고 갈렙과 여호수아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갈렙이 가나안 땅에 40일간 스파이로 정탐하러 나갔다 돌아와서 다른 열 사람들의 부정적 보고와는 달리 함께 용감하게 싸워서 거인 족속들을 쳐부수자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충성과 열정에 감탄하였다. 


 특히 갈렙의 나이가 그 당시 사십이었다는 사실이, 사십세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하나님을 믿게 된 나의 새로운 삶에 신선한 도전이 되었으며, 늦은 나이에 구세군의 사역자로 부름받은 후 특별히 갈렙의 후반부 삶의 이야기가 나에게 강력한 메시지로 다가왔다. 


 가나안 정복 전쟁의 끝 무렵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45년 만이었고, 갈렙은 이미 85세의 노장이 되어있었다. 그는 헤브론 땅을 밟으며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Give me this mountain)"라고 외쳤다(여호수아서 14장 12절). 


 결국 갈렙은 그 당시 다른 부족들이 겁내고 두려워 감히 접근조차 못하던 그 산지에 거주하고 있던 거인 집단 아낙 족속을 궤멸시키고, 하나님께서 갈렙에게 약속하신 헤브론 땅을 유다지파의 기업으로 상속받게 되었다. 


 헤브론 땅이야 말로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 이삭, 이삭의 아내 리브가, 야곱의 유골이 매장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 가나안의 상징이었다. 마침내 가나안 정복전쟁은 끝났고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 전쟁을 최후 승리로 이끈 이스라엘의 영웅이었다. 


 성경 말씀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갈렙의 마음(정신)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고 그의 믿음을 특별히 인정하시었음을 보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갈렙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그러나 내 종 갈렙만은 그들과 다른 정신을 가지고,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민수기 14장 24절). 


 나는 캐나다 땅에서 실로 축복받은 사람이다. 캐나다 이민 이전과 이후의 삶이 180도 바뀌었다. 사십세에 비로소 평생 처음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죄로 얼룩져 살아온 지난 삶을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면서 구세군의 병사로 입대(세례식) 하였다.


 처음 몇 년은 기쁨과 열정으로 교회 사역과 지역사회에 부교(집사) 직분을 받고 열심히 봉사하였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관과 우선순위의 도전과 갈등으로 인하여 20여년의 신앙생활을 하면서 갈수록 영적 전쟁의 패잔병 같은 모습을 발견하며 실망감과 회의에 쌓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다시 찾아 오셨다. 깊은 회개의 마음으로 기도와 말씀공부에 전념하며 지내던 어느날 항상 나 자신의 삶의 목표, 이민자로서의 성공을 추구하던 나에게 하나님은 그분의 목표가 나의 삶 속에서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닫게 하여 주셨다. 


 60세 나이에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라!" 처음에는 어떻게 그런 미션이 나에게 가능할까? 모든 상황과 여건이 도저히 불가능하여 보였다. 그러나 기적같이 문이 하나씩 열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캐나다 구세군 본부의 지도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특별히 늦은 나이에다 영어로 사관학교 전 과정을 공부하여야 하는 어려운 현실적 장애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적 조건을 초월하여 나의 소명을 소중하게 받아주고 검증하고 격려해주며 사역자가 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낌없이 해주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과 감사를 드린다. 


 나는 불신자로 캐나다로 이민 와서 구세군 사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변화된 삶이기에 이곳 캐나다의 이민자, 다민족 커뮤니티가 내게 주어진 선교의 현장이라고 생각한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메신저로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 (Heart to God, Hand to Man)" 이러한 구세군의 복음 정신을 실제로 다문화권 지역사회에서 나누며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나의 소명이고 사명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제 토론토 제인-핀치의 욕우즈 교회에서 사역한지도 벌써 4년이 지났다.


캐나다 구세군 사관들은 대체로 4-5년마다 임지가 새로 배정되어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 많은 사관들이 65세에 정년은퇴를 하지만 나는 늦은 나이에 사역을 시작하였기에 아직 은퇴를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지난달 캐나다 구세군 본부로부터 전화와 공문을 받았다. 나의 새로운 임명지와 직분이 주어졌다. 캐나다 수도 오타와에 있는 "글래드스톤 교회 (Gladstone Community Church, Corps Officer/Pastor)의 담임사관(목사)으로 명령 받았다. 이 교회는 오타와에 설립된 최초의 구세군 교회로 140년의 역사를 갖고있는 교회이다. 


 현재는 오타와 다운타운에 위치한 윌리암 뿌스센터(구세군 창립자 William Booth의 이름을 딴 구세군의 복지 및 재활센터) 내부로 교회가 이전 되었다 한다. 69세의 나이에 새로운 사역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과 캐나다 구세군 본부에 감사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엎드린다.


 하나님!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저에게도 갈렙이 85세에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Give me this mountain!)"라고 외치며 담대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처럼 감히 그리스도의 충성된 군사로 무장시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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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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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2
태권도 비젼(TAE KWON DO VISION)

 

태권도(Tae Kwon Do)하면 코리아(Korea), 대한민국의 무도가 세계 방방곡곡에 그 이름을 떨치고 있다. 이제 서기 2000년 호주 시드니에서 열리는 올림픽경기부터는 정식 종목으로 채택까지 되었다. 실로 국위 선양 최대의 쾌거 중의 하나이다. 태권도의 기원은 약 1300 여년 전 신라,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태껸(TaekKyon), 혹은 수박기(Soo Bak Gi)라고 불리운 궁중 무술(손과 발만 쓰는 무술)로 임금 앞에서 시합을 벌이고 우승자를 가리어 큰 상을 주었다고 전하는데 이조시대에는 민간인에게 전수되어 명맥을 유지하여 오다가 일제시대에는 심한 탄압으로 인해 일본의 무술인 당수도(Karate) 그늘 아래서 우리 민족의 전래 무술인 태권도 마저 말살되어 버릴뻔 했다. 


그러나 광복과 6.25전쟁 이후 폐허가 된 대한민국에 현대 태권도의 진수를 체계적으로 보급할 수 있었던 것은 한 사람의 무관 최홍희 중위의 집념의 결실이었다. 나중에 최홍희 장군은 전군에 태권도를 의무 보급하고 민간 차원까지 태권도를 양성시켰으며 체계를 세워나갔다.

 

태권도의 품새가 각형(24형)으로 체계가 서고, 시합 규정, 태권도 정신세계… 등이 모두 영문책으로 번역되고 조직도 국내에서 국외로 뻗어나갔다.


이때 태권도 국제연맹(최홍희 총재)이 조직되고 전 세계에 태권도 사범들이 하나 둘씩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시아의 베트남, 대만, 터키, 이란에서 시작해서 동구라파, 전 유럽으로, 전 미대륙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한국의 정치적 변화와 국제적인 기류로 인해 태권도 세계연맹이(김운용 총재, 현 I.O.C 부위원장) 새로 탄생되었다. 아무튼 태권도연맹은 두 조직으로 이원화 되었지만 태권도를 배우는 세계 인구는 갈수록 늘어났고 가장 뛰어나고 과학적인 무도(Martial Art)로, 스포츠로 각광 받게 되었다. 

 

그 배후에는 국제연맹과 세계연맹이 이루어놓은 세계적인 조직력으로 공산권과 자유진영을 초월한 스포츠의 영역을 넓혀나간 빛나는 업적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겠지만 무엇보다도 태권도를 가르치는 사범들의 피나는 노력이 그 땀과 열성과 태권도 장인정신이 대한민국을 오늘날의 태권도 종주국으로서의 위치로 만들 수 있었다고 본다.

 

실로 이국 땅에 와서 대한민국의 무도를 가르치는 태권도 사범들이야 말로 국위 선양을 매일같이 하는 진정한 애국자들이 아닐까? 나의 주위에는 태권도 사범들이 많이 있다.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고객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데 공통적인 것은 하나같이 당당한 모습이다. 물론 신체적으로 운동을 많이 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정신세계가 마스터(Master) 기질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듣는 이야기 중 참으로 유감인 것은 제자들의 대부분이 캐네디언이요 한국인 제자들은 손을 꼽을 정도라 한다. 

 

태권도는 세계적인 스포츠로 올림픽 경기종목으로 까지 발전했는데 정작 우리 이민자들에게는 남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물론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활이 변명이 될 수도 있지만 한 번 짚어보고 넘어가야 할 과제가 아닌 듯 싶다. 소위 이민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2세, 3세 들에게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이곳에 하루 빨리 동화하는 것이라 하겠지만 우리 고유의 무도인 태권도를 그들에게 알려주고 배워주게 하는 것은 단순한 호신술로 배우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수련을 통해 태권도의 깊은 정신세계를 피부로 느끼고 배우게 하는 산 교실(도장)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태극기 앞에서 엄숙하게 경례하고 한국인 사범에게 정중하게 절을 한 뒤 차렷, 경례, 모든 태권도 용어를 한국어로 우렁차게 외치는 모든 캐네디언 수련자들 중에서 태권도 유단자 한인 소년 소년들이 더욱 많이 배출되어져야 하겠다. 그래서 그들이 유창한 영어로 태권도를 캐나다 전역, 아니 세계 곳곳에 보급하고 조국 코리아의 태권도 명맥을, 그 정통성을 이어받아 무도 스포츠의 금자탑을 쌓아 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 태권도는 무도 차원에서 전문 스포츠 직업인(Job)과 사업(Business) 그리고 민간 외교관(Diplomat)으로서의 비젼(Vision)도 있음을 아아야 한다. 이민 와서 성공한 사람들이라면 으레 고생해서 돈을 많이 벌었거나 전문직에 오를 수 있도록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을 꼽지만 태권도를 통하여 스포츠 전문인으로 당당히 살아가는 태권도 사범들이야 말로 위의 세가지를 다 이룬 성공한 한국인들이 아닐까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 2세에게 태권도 비젼(Tae Kwon Do Vision)을 심어주는 것이다. 2000년 올림픽 태권도의 열기가 우리 한인 교포 사회에도 번져 나가기를 빌며, 우리 이민생활의 현장에서 어글리 코리안(Ugly Korean)이 아니라 뷰티플 코리안(Beautiful Korean), 자랑스러운 한국인(Proud Korean)이 되는 소망이 한낱 꿈이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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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7
다국적 가족

 

 

다국적 가족

 

 최근들어 고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해외 이민 대상국가로 캐나다가 최우선 순위에 든다고 한다. 그만큼 캐나다가 평화롭고 살기좋은 나라로 다문화 다국적 배경의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국가 이미지로 세계인에게 부각되고 있어 좋은 현상이다.

 

 이제 캐나다는 어느 도시를 가든지 가정, 직장, 학교, 관공서, 교회, 커뮤니티의 어떤 분야든지 복합문화 배경이 보편화 돼가고 있다. 내가 사역하고 있는 교회만 하더라도 25여개 나라에서 온 다국적 이민자들이 회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지면을 통하여 나의 개인 가족의 다국적 스토리를 나누어 보고자 한다.

 

 이십오년도 넘은 지독히도 추운 겨울 날, 흩어져 살던 우리 가족들이 캐나다 땅에서 모처럼 만날 기회가 생겼었다. 마침 미국을 방문 중이었던 나의 막내 여동생 가족을 캐나다와의 국경이 접한 버팔로 공항에서 픽업하기로 했기에 서둘러 나이아가라(Niagara Falls)를 향해 떠났었다.

 

 미국행 다리를 건널 때만 해도 우리 가족들은 국적 같은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았었는데 막상 캐나다 입국시에 각자 여권을 걷어 건네주자 이민국 관리가 하는 말이, "What an international family you are! All different nationalities!"(당신네 가족들은 실로 국제 가족들이군요, 온 식구가 모두 국적이 다르네요!) 하는 것이 아닌가? 정작 우리도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던 다국적 가족의 신분이 진정 그곳에서 노출되었다. 그러니까 가족들의 국적을 순서대로 정리해보면

 

 1)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한국 국적을 고집하고 있었을 때이기에 물론 대한민국 시민(Korean)

 2)나의 딸아이는 캐나다에서 태어났으니 당연히 캐나다시민(Canadian)

 3)나의 아내는 70년대부터 획득한 유럽 오스트리아 시민권자(Austrian)

 4)같이 동행한 나의 남동생은 80년대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인(Parisian)이 되었기에 프랑스 시민권자(French)

 5)버팔로에서 픽업한 나의 여동생 가족들은 일찍이 뉴질랜드로 이민가서 모두 그곳 시민권자(New Zealander)

 

 좌우지간 우리들도 그 관리도 한바탕 크게 웃었다. 이것이 소위 국제가족의 현장 체험이 아니었던가? 어느새 우리 가족들은 모두 한국을 떠나 다국적 시민들이 되었던 것이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영하 30도의 살인적 바깥 추위와는 딴 판으로 우리 가족들은 그저 반갑고 기쁘고 신나서 떠들고 웃어대며 지나간 옛 이야기들로 용광로를 피웠었다. 같이 성장했던 어린 시절 동네 이야기들로 부터 각자 뿔뿔이 흩어져 하나씩 떠나던 이민, 아니 새 세상으로의 탈출(?)과 도전이라는 단어가 우리들에게는 더욱 어울렸던 그 시절의 스토리를 회상해 본다.

 

 1)청춘을 방황하며 살다가 캐나다로 이민와서 하나님을 만나 변화된 삶으로 이제야 겨우 감사와 자족함을 배우며 살아가는 나 자신(Thomas)

 2)이 땅에서 태어나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나의 2세대 딸아이 엘리사 (Elyssa)

 3)아직도 가끔씩 옛 오스트리아 비엔나(Vienna) 시절의 와인과 왈츠의 향수에 젖어있는 나의 아내 티나(Tina)

 4)어린 시절부터 가장 환상적인 삶을 지향하고 꿈꾸며 예술의 나라 프랑스 파리 지붕 밑에서 지극히 기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의 남동생 (Ulymar)

 5)일찍이 젊은 나이에 뉴질랜드로 정착하여 그곳 시민이 된 나의 여동생 (Michelle)과 나의 매제(Henry), 사랑하는 그들의 딸 애슐리(Ashley)와 아들 (William), 그리고 늦은 나이에 뉴질랜드로 이민하여 오클랜드(Auckland)에서 은퇴의 삶을 살고 있는 나의 둘째 형(Daniel)과 조카(David)

 6)아직도 고국에 혼자 남아 토속적인 한국인의 긍지를 가지며 오직 신앙 안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큰 형님, 문득 한가족 한가족의 얼굴을 떠올리며 생각해 본다.

 

 따지고 보면 오대양 육대주 곳곳마다 우리같이 다국적 가족들이 된 국제가족이 왜 우리 집안 하나뿐이겠는가? 이제는 이웃 도시 나들이 정도로 마음만 먹으면 지구촌 어디든지 날아가서 만날 수 있는 한 지붕 세상이 되었지 않은가? 우리가 어느 국적을 가졌던 간에 우리의 조국 코리아를 잊지 않고 우리 고유의 문화와 정서를 우리의 후손들에게 전승하며 하나님 안에서 감사하며 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훌륭한 삶이 아닌가?

 

 천지창조를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세기 2장 28절) 하시지 않았던가? 하나님은 다양하게 인간과 동식물과 자연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유대 민족이 흩어져 디아스포라(Diaspora), 다국적 가족들이 되어 이 세상 전역에 펴져 살다가 새 국가 이스라엘을 세운 것을, 그 강력한 힘을 역사를 통하여 알고 있다.

 

 이미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사는 우리들, 이제는 지상국적은 모두 달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시민권을 모두 함께 소유하는 소망을 갖고 모두 기쁘게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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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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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1
자선냄비와 구세군

 

 

어느덧 12월이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사람들은 더욱 들뜨고 분주해진다. 이 때쯤이면 어수선한 세모 분위기 속에서도 어김없이 길거리에 낯익은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등장한다. 제복 입고 모자 쓴 구세군인의 종소리가 우리에게 잊혀진 불우이웃을 생각나게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정경이다.

 

크리스마스 자선냄비의 유래는 백년도 더 된다. 처음 시작은 189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항구도시의 구세군 담임사관(목사) 죠셉 맥피(Joseph McFee)의 크리스마스 자선 디너 모금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성탄절을 앞두고 구세군 교회에서는 오갈 데 없는 가난한 사람들 천 여명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하는 대규모 디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점은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데 드는 엄청난 비용이었다. 교회 사람들이 의견을 내고 기도를 함께 열심히 하고 있는 가운데 날짜는 하루하루 다가오기 시작했다. 

 

맥피 사관은 밤잠을 설치며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큰 부담이 안되고 단시일 내에 모금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을까를 몰두하고 있었다.

 

어느날 밤 맥피 사관은 그가 젊은 시절 선원으로 보냈던 영국의 리버플(Riverpool) 항구가 갑자기 떠올랐다. 당시의 뱃사람들은 부둣가에 설치된 심슨 냄비(Simson’s pot)라고 불리는 커다란 쇠 냄비 안에다 동전 몇 닢씩을 던져 넣어 자선을 하곤 했었다. “바로 그것이다” 맥피 사관은 그 냄비 아이디어 착안했다. 
그 다음날 아침 그는 샌프란시스코 항구 부두 책임자를 만나서 바로 모금허가를 받아냈다.

 

그리고 꽃게(Crab)를 끓이는 커다란 쇠 냄비를 선원들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선창가 한복판에 설치하였다. 마침 오크랜드 페리호가 정박하고 있었기에 더욱 많은 승무원들과 여객들이 있었다. 그리고 페리호 터미날 대기소 내에다 추가로 놋 냄비 하나를 따로 설치하였다. 

 

며칠 후 두 냄비에는 동전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덕분에 그 해 1891년 천명이 넘는 불우이웃의 크리스마스 디너는 성대히 끝날 수가 있었다. 그 다음해 구세군은 같은 장소에다 같은 방법으로 자선냄비를 설치해 천 사백 명이나 되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따뜻한 크리스마스 디너를 대접했다. 자선냄비 옆에는 제복을 입은 구세군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찬송가를 부르며 가로전도도 했다. 이로부터 전 미국의 각 주에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해마다 설치되고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이제는 전 세계 백 여 개 국가에서 백년이 넘도록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어버린 것이다.

 


구세군(Salvation Army) 그들은 누구인가?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Heart to God, Hand to Neighbor) 이것이 바로 구세군 정신이다. 구세군의 창시가 윌리암 뿌드(William Booth, 1829~1912) 감리교 목사는 산업혁명 이후의 빈부의 차가 극심했던 영국 동부 런던에서 그의 부인 캐더린 뿌드와 함께 1865년부터 가로 전도를 시작했다. 그 당시 교회와 사회로부터 소외된 계층인 가난한 사람들이 영혼 구원을 위해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을 돌보는 봉사활동을 벌였었다. 

 

나중에 커져 가는 조직에 군대체제를 도입하여 구세군(그리스도의 병사)이라는 명칭을 쓰게 되었고(1878년) 오늘날 전 세계 백 여개 국가에서 그들의 언어로 구세군은 영혼 구원과 당면한 사회 구원 문제(마약, 알코올 중독, 교도소, 피난처, 부랑아, 병원, 노인, 가정, 유아, 여성문제)들에 적극적으로 활동해 오고 있다.

 

캐나다만 해도 1870년 온타리오주에서 시작한 구세군은 오늘날 전국에 교회 372곳, 사관(목사) 2,014명, 신자 92,269명, 사회봉사기관 152곳과 각 기관에서 일하는 봉사자들로 캐네디언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고 있다. (97년 구세군 연감 참조) 

 

우리 교민사회에도 구세군 한인 토론토 교회가 창립 11주년을 맞는다. 몇 년 전만 해도 블루어 한인거리에서 자선 냄비를 설치하고 어른과 함께 어린이 악대들이 나팔을 불며 불우이웃 돕기를 호소하기도 했다.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나팔을 불던 아이들이 이제 틴에이저들이 되어 청년악대(Youth Brass Band)를 조직하였다.

 

올해는 스카보로(Scarborough)의 두 군데 몰(Mall)에서 크리스마스 자선냄비를 설치하고 11월 24일부터 자원봉사자 16명과 함께 한달간 수고할 것이라 한다. 참으로 흐뭇한 소식이다.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 “내가 구원 받은 것은 남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외침은 창립자 윌리암 뿌드 대장과 구세군의 모든 것을 포함한 말이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었다.

 

“나는 소외된 자를 위하여 끝까지 싸우겠노라. 부녀자들이 울고 있는 한, 어린아이들이 굶주림을 당하고 있는 한, 가난으로 여인인 버려져 있는 한, 사람들이 유치장에 들락날락 하는 한, 나는 싸우겠노라.” 올해도 구세군들은 말없이 그들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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