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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숙 여행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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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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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4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기(15)

 


세인트 이레네-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32일차/28 km)

 

 

 

 

 드디어 대장정의 마지막, 별들이 흐르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로 향하는 날이다. 매 순간 어려움을 참아가며 이 날을 기다렸으나 막상 끝에 다다르니 성취감보다 아쉬운 마음이 더 크게 자리 잡는다. 조금 일찍 이런 경험을 했더라면 삶의 결이 한층 다채로웠을 텐데 하는 회한과 함께.


세상사 모두 내려놓고 오로지 내 육신이 보내오는 신호에 귀 기울이며 걷는 일에만 열중했던 지난 한 달여, 단순한 일과였지만 결코 만만하지 않았던 날들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압축하여 살아낸 듯하다.


 따뜻한 저녁과 깨끗한 잠자리를 주셨던 호스텔 노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길 위에 섰다. 지난밤엔 간간이 폭우가 쏟아져 걱정을 더하게 하더니 이토록 찬란한 아침을 예비하기 위함이었나 보다. 팡파르라도 울리며 걷고 싶은 나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많은 순례자들이 이미 길 위에 그득하다.


그룹으로 행군하는 남녀 고등학생들의 발랄한 움직임, 이십 일째 아빠와 함께 걷는다는 아홉 살짜리 소녀의 상쾌한 걸음걸이, 첫돌 맞은 딸아이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고 싶다는 어느 젊은 부부의 소망까지 어우러진 축복의 길은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였다. 


 마지막 날이라 마음가짐을 가볍게 했던 게 오산이었다. 상쾌했던 기분은 출발 한 시간 만에 사라지고 여느 때와 별 차이 없는 고행의 길이 산적해 있음이 피부로 느껴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지 다짐하면 할수록 걸음은 점점 헛돌기만 했다.


 그 동안 누적된 피로와 부실한 조식 그리고 수면부족까지 겹쳐 야트막한 언덕길에서도 비척거리기 일쑤였다. 이런 땐 무리하기보다는 편안한 장소를 골라 휴식을 취하는 게 최상의 방법임을 안다. 


판쵸 우의를 깔고 누워 하늘을 보니 구름 낀 하늘도 맑은 가을 하늘처럼 청명해 보인다. 길지 않은 세월 동안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가슴 뭉클한 얼굴들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그들도 우리처럼 완주의 기쁨을 안고 이 길 어딘가에서 부지런히 걷고 있으리라.


 오늘은 껍질 벗은 유칼립투스 나무 숲길을 유난히 많이 걸었다. 은초록 긴 잎새를 펄럭이며 쭉쭉 뻗은 나무는, 십여 년간 감싸고 있던 겉껍질을 벗어낸 발그레한 알몸이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일기 변화가 심한 이곳에서 수 없는 담금질로 거듭난 나무를 보니 왠지 마음이 숙연해진다. 


과연 나는 이 길에서 어떤 모습으로 거듭났을까. 종착지가 가까워질수록 뚜렷이 집히는 게 없는 나는 부러운 듯 유칼립투스 나무를 곁눈질하며 얼굴만 붉힌다.

 

 

 

 


 늦은 오후 환희의 언덕 ‘몬테 도 고조’(Monte do Gozo)를 넘어 등꽃이 피어 만발한 산티아고에 입성했다. 도심 곳곳엔 많은 인파와 축하 파티가 한창이었다. 우리는 이방인처럼 멀찍이서 서성이다가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했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골목을 한참 지나 대성당의 위용이 한 눈에 들어오는 오브라도이로(Obradoiro) 광장에 들어섰다. 해질녘 광장엔 그 동안 함께 했던 순례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썰렁한 바람만 나부꼈다.


남편과 함께 어깨를 감싸며 자축했다. 조그만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인연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들인가를 새삼 일깨우는 순례길 이었다.

 

 

에필로그

그리고 그 후


산티아고에 도착한 다음 날 우리는 피스테라(fisterra)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중세의 순례자들이 '땅 끝'이라 지칭한 그곳은 순례의 끝이자 시작을 의미하는 0.00 km 표지석이 있는 곳이다. 


한 시간 여 달린 끝에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 세(Cee)에 도착했다. 순례길 동안 서로 힘이 됐던 미주네 가족을 만나 회포를 풀고 피스테라를 향했다. 막차 시간까지 2시간 남짓, 십 여 킬로 넘는 길을 달려 종착지에 닿으니 메케한 연기냄새와 함께 먼 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장해 보였다. 


  시작과 끝이 교차하는 정점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마음으로 노란 화살표를 떠올렸다. 도전과 가능성을 경험했던 이번 순례길, 노란 화살표와 함께 하는 앞으로의 삶이 풍요로울 것 같다. 


 그리고 1년 후 우리는 다시 배낭을 꾸렸다. 이번엔 산티아고 '북쪽 길' 도전이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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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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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30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기(14)

 

만실라-레온(20일차 / 20 KM)

 

 

 


 순례길에 오른 지 어언 이십여 일째 접어들었다. 푸석한 눈밭을 헤치며 피레네 산맥을 기어오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봄의 한가운데를 건너고 있다. 거북이 걸음으로 두 계절을 넘어서니 뿌듯함과 함께 결코 만만하지 않았던 날들이 그림자 되어 내 뒤를 따른다.


초보 순례자를 그토록 고생시키던 발의 물집도 이젠 굳은살로 박혀 견딜만하고 겉돌기만 하던 묵직한 배낭도 신체의 일부분인양 착 달라붙어 중심을 잡아준다. 내 삶을 지탱하는 일용품들을 온전히 내 몸에 실어서 천천히 살아보리라는 애초의 의지대로 행하고 있음에 자부심을 가지며 하루하루의 고통을 인내로 다스리며 나아가고 있다.


 오늘은 큰 도시 레온(Leon)에서 그 동안 누적된 피로도 풀고 에너지도 충전 할 겸 평소보다 짧게 일정을 짰다. 처음부터 예상은 했지만, 매일 바뀌는 낯선 잠자리와 끼니를 더할수록 허기를 부르는 순례자 식단으로 강도 높은 행군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감내해야 할 부분임을 인지하며 적응해 왔으나 현저히 떨어지는 체력은 어쩔 수 없다.


 모처럼 휴일을 맞은 기분으로 가볍게 숙소를 나섰다. 매일 노상에서 일출과 일몰의 경이로움을 체험했던 그간의 떨림은 잠깐 접어두고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즐거운 소일거리를 떠올리며 경쾌한 걸음을 이어간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시기라도 하듯 코스는 왜 그렇게 오르내림의 연속인지 반나절 동안 가해지는 운동의 강도는 하루치와 다를 바 없었다.

 

 

 

 


느슨해진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서울에서 온 W씨 부부와 앞다투어 난코스를 해결해 갈 즈음 우려했던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우의를 꺼내 입으며 앞 뒤 동행들을 둘러보았다. 그들도 일상처럼 우의를 챙겨 입고 묵묵하게 가던 길을 계속한다. 


그런 모습들이 한없이 고독해 보이기도 하고 때론 자유롭게 보이기도 한다. ‘처연한 아름다움’을 이끌어 낸 빗길의 주인공들, 오늘 하루 모두 편안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어려운 여건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동행들 중 특히 애착이 가는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함께 출발점에 섰던 사람들이다. 몇 구간만 안보여도 혹시 탈이 난건 아닌지 염려되어 그들의 안부를 수소문하고, 어쩌다 같은 숙소에 들기라도 하면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마음이 푸근해진다. 


꼭 같은 길을 걸었어도 각자 체험한 세계가 다르다 보니 대화의 끝은 쉽사리 나지 않은 채 다음을 기약하기 일쑤다. 우리들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은, 신앙심 고취, 한 걸음 도약을 위해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도전, 아픔을 치유하기 위하여 등 다양한 이유로 고행의 길에 들어섰건만 이내 그것들마저 내려놓고 오로지 걷기에 함몰되어 버린다는 요지는 충분히 공감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동쪽에서 서쪽 끝으로 이어지는 팔백 킬로미터 순례길의 중간 지점이자 교통의 요충지인 부르고스(Burgos)에서 그 동안 함께 했던 다수의 순례자들이 빠져나간 대신 더 많은 사람들이 유입되어 길은 풍성한 움직임으로 생기가 넘친다. 


새로운 사람들 중에 유독 눈에 띄는 한 그룹이 있어 그들에게 먼저 다가갔다. 다섯 명의 프랑스 할머니들로 구성된 일명 ‘할미꽃 그룹’은 만날 때마다 유쾌한 웃음을 선사하여 지루함을 덜게 해 주었다. 


평균 연령이 칠십 세라는 그들은 일 년에 보름씩, 삼 년에 걸쳐 순례길을 완주할 계획이라며 지친 기색이라곤 내내 찾아볼 수 없었다. 비결을 물었더니 십 수 년 동안 프랑스 전역을 돌며 함께 하이킹을 다닌 결과라고 했다. 건강과 친구 그리고 그들이 함께 할 아름다운 시간들이 함박꽃처럼 화사하게 클로즈업 되어왔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인 레온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섰다. 아직 아득한 거리지만 오랜만에 입성하게 될 대도시가 얼마나 반가운지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었다. 늘 복잡한 곳이 싫다고 하면서도 막상 떠나 있으니 그리움이 배가되어 오전 내내 청사진만 그렸다.


우선 순례객들이 많이 몰리지 않는 시가지 초입에다 정갈한 숙소를 마련하고 곧장 슈퍼마켓으로 가서 쇼핑을 해야겠다. 쌀, 삼겹살, 채소, 과일 등등. 그 동안 잊고 지냈지만 결코 놓지 못한 식품들을 마음껏 요리하여 거나한 상을 차리리라. 


그리곤 모아둔 옷가지들을 손빨래 하여 뒤꼍에 널어야겠다. 언뜻언뜻 비취는 햇살이 얼마나 도와줄지 알 수 없지만. 내일은 에너지 충만한 하루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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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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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2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13)

 

테라디요스-엘 부르고 라네로(18일차/24 km)
미소가 고왔던 알베르게 주인장들

 

 

 

 


 불현듯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다. 산뜻한 기분에 비해 온몸이 묵직하다. 십 여명의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진 시간, 일출을 기다리며 뒤척였다. 이를 눈치 챈 남편이 짐 챙겨 나가자는 신호를 보내왔다.


 숙소를 벗어나니 거센 바람을 동반한 매서운 날씨가 맹공해 왔다. 차라리 자리 보전하며 기다리는 편이 좋았을 걸 하는, 때늦은 후회가 치밀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어이 없는 웃음이 또 웬일인가. 큼직한 배낭을 맨 남녀가 희뿌연 달빛을 받으며 황급히 걸어가는 야반도주자 행색이 말초신경을 자극했음 이리라. 


 판쵸 우의로 바람과 추위를 가려가며 신 새벽 산악 길을 제법 걸었다. 동녘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며 여명이 밝아오자 앞서 걷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둠과 추위를 가르며 의지를 불태운 그들의 뒷모습이 처연하면서도 동료애가 느껴져 위안이 되었다. 


 잔뜩 껴입은 옷가지를 한 겹 두 겹 벗어가며 상쾌한 행보를 이어갈 즈음, 같은 숙소에 유숙했던 사람들이 교차로 부근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반가워하는 우리와 달리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은 길을 재촉해 갔다. 


나는 그들이 가고 있는 곧게 뻗은 차도와 끝을 알 수 없는 꼬불꼬불한 산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례가 끝나는 날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길, 노란 화살표 따라 산길로 접어 들었다. 


 모라레스 마을을 지나 사하군 도심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허기가 밀려왔다. 새벽 길 나서느라 아침을 간식으로 때웠더니 온 몸이 반란을 일으켰다. 급한 대로 마켓에서 샌드위치를 구입하여 위기는 넘겼으나 피곤함은 점점 더 가중되어 일정을 단축해야만 했다. 앞으론 체력에 각별히 신경을 쓰면서 일정을 짜야 할 것 같았다. 


 '엘 부르고 라네로' 마을의 공립 알베르게에서 둥지를 틀었다. 삼 십 여명의 순례자들이 식당에 모여 다채로운 저녁 시간을 가졌다. 돌아가면서 자기 소개와 길 위에서 느낀 소감을 풀어놓기도 하고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정성 어린 식사는 물론 진심을 다해 순례객들을 보살펴 주던, 시카고 카톨릭 교단에서 파견 나온 미셜 님과 스페인 교구 소속 요셉 님의 헌신적인 봉사는 내내 여운으로 남아 험한 길 넘는데 힘이 되었다.

 

 

엘 부르고 라네로-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19일차 / 28 km)
거센 자연에 맞서다.

 

 

 

 


 엊저녁 함께 한 멤버들이 간헐적으로 모여 커피와 토스트로 아침을 해결하고 다시 그들의 세상으로 나아갔다. 빽빽하게 채워졌던 숙소가 헐거워지며 뒤쳐진 우리도 짐을 꾸려 나섰다. 짬짬이 일손을 도우면서 서로 정이 든 미셜과 요셉의 표정이 못내 섭섭해 하는 눈치다. 헤어짐이 아쉬운 모두의 마음을 담아 기념 촬영을 한 다음 어려운 발길을 돌렸다. 


 우중충한 하늘이 내내 위협적이더니 얼마 못 가서 비바람이 몰아쳤다. 오늘은 비교적 완만한 코스라 안심했는데 시작부터 노란 불이 깜박거렸다. 다행히 근 거리의 터널로 까미노가 이어져 비도 피할 겸 쉬어가기로 했다. 


터널 벽면 빼곡히 씌어진 각국의 응원 메시지가 일어나라 외치건만 몰려오는 졸음에 눈 앞이 가물거렸다. 배낭에 기대어 잠깐 졸고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 큰 무리 없이 다음 일정을 소화해 낼 수 있었다. 


 오전 내내 우박까지 동반한 악천후를 견디며 조그만 마을 레리에고스에 닿았다. 동네가 좀 노후 되긴 해도 주민들의 왕래가 눈에 띄어 여간 반갑지 않았다. 한 주민에게 레스토랑 위치를 물었더니 까마득하게 보이는 7km 전방의 만시야를 가리켰다. 


일요일이라 동네 마켓도 철시한 상태여서 어렵지만 선 걸음에 이동 할 수 밖에 없었다. 비척거리며 마을 길을 내려가다 보니, 아까 그 주민이 오렌지 바구니를 우리에게 내밀었다. 사람 사는 동네, 나눔의 향기가 오렌지 향기보다 더 싱그러웠다.


 갖은 고초 끝에 육중한 돌 성곽이 이채로운 만시야에 도착했다. 한차례 거센 폭우가 지나간 도심은, 고풍스러움에 깔끔함을 더한 격조 있는 분위기로 생쥐 꼴이 된 순례자를 주눅들게 했다. 건축물이며 분위기가 중세에 머문 듯한 뒷골목에 숙소를 정하고 샤워와 빨래 등 장대비 뒷설거지로 한참을 동동거렸다. 


 사람들의 훈기가 그득한 바에서 늦은 점심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따끈한 난롯가에 앉아서 온종일 비에 젖어 고생한 마음을 무한정 말렸다. 매일매일 새로운 기록에 도전하는 나날들, 내일은 또 어떤 기록에 도전하게 될지 새삼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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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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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6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12)

 

부르고스~온타나스(14일차 / 31 km)
녹색정원 메세타(Meseta)

 

 

 


 가랑비 내리는 부르고스 도심을 오랫동안 걸었다. 상춘객으로 붐비던 어제와는 달리 차분하게 가라앉은 아침 분위기에 매료되어 잠시 발길을 멈췄다. 하얀 천막 아래 난로 불이 활활 타는 야외 카페를 그냥 지나치는 건 실례가 아닌가. 토닥거리는 빗소리와 달콤한 콘 레체 커피를 천천히 음미하며 약간의 여유를 부렸다. 


 오락가락 하는 가랑비를 맞으며 겨우 대도시를 벗어났나 했더니 이번엔 하이웨이와 쌍벽을 이루는 지루한 코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굳은 날씨에 딱딱한 아스팔트 길을 장시간 걷는다는 건 썩 신나는 일은 아니지만 짝꿍과 손잡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 사이 메세타 지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라베(Rabe) 마을의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은은한 종소리가 마음을 고요하게 이끌어 주었다.


 해발 천 여 미터에 이르는 녹색 정원, 메세타 고원지대에 올라섰다. 며칠간 산비탈 포도 농원을 넘나들다 마주한 밀밭은 마치 토론토 근교를 걷는 듯 친근하게 다가왔다. 사방이 초록 물결로 넘실거리는 밀밭 길을 초록에 떠밀려 가듯 걸었다. 멀리 새파란 하늘과 청 밀밭이 맞닿은 지평선을 바라보다 몇 차례 발을 헛디디기도 했다. 그렇게 풋풋한 기분으로 얼마나 걸었을까. 


뜨거운 햇볕이 언제 우리 곁에 왔는지 온몸이 순식간에 땀 범벅이 되었다. 상큼했던 기분은 한 순간 날아가고 나무 그늘이라곤 없는 망망한 밀밭에서 수시로 인내의 한계를 느껴야 했다. 우천으로 인해 물 준비를 소홀이 했던 점을 뼈저리게 느끼며 메세타 지역의 진면모를 제대로 경험한 시간이었다. 


 후반부엔 외부에서 유입된 이십 여명의 순례길 체험 팀이 함께하여 활력을 주었다. 특히 의족을 착용한 채 가족과 함께 참여한 제이슨 할아버지의 선전에 큰 박수를 보냈다.


가장 힘들었던 하루의 끝 온타나에서, 남편의 학교 후배와 살얼음 뜬 생 맥주잔을 기울이며 험한 길 싸워 이긴 무용담으로 저녁 시간이 뜨거웠다. 

 

 

온타나스~보딜라 델 까미노(15일차 / 28 km)
라벤드 향기와 할아버지

 

 

 


 모처럼 쾌적한 방에서 단잠을 잤다. 어제 오후 동네 초입에 있는 숙소에 들어 갔다가 젊은 열기에 밀려 동네 끝으로 옮긴 게 전화위복이 되었나 보다. 


일반 알베르게에서는 보기 드문 소수 정원에다 편안한 침대며 깔끔한 침구까지 뭔가 대접받는 느낌에 기분이 좋았다. 아래층에서 묵고 있던 후배가 와서 보곤 특혜를 받았다며 은근이 부러워하는 눈치를 보였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걷다 보니 가끔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 들어 한 숨 돌리게 한다. 일면식이라곤 없는 곳에서 받은 특혜(?) 덕택에 그 동안 쌓인 피로를 풀고 상쾌한 출발을 했다.


 꼬불꼬불한 마을 길을 실타래 풀듯이 내려왔다. 엊저녁 메세타 고원지대를 넘어온 뒤풀이로 왁자하던 골목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언덕 아래 아늑하게 자리잡은 온타나스 마을을 막 벗어날 즈음, 무뚝뚝한 할아버지 한 분이 '부엔 까미노'하며 라벤더 가지를 불쑥 내밀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앞섶에 꽂았더니 은은한 향기가 내내 코 끝에서 맴돌았다. 길게 뻗은 지그재그 오르막 길을 응원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그 길 위에 오르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아름드리 자작나무가 빼곡하게 도열한 개울을 지나 '산 안톤' 마을로 들어섰다. 인적이라곤 없는 마을에 '콘 벤토 데 산 안톤' 성당만이 덩그러니 남아서 객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고 있었다. 비록 퇴색되긴 해도 옛날의 영화가 그대로 읽혀지는 엄청난 규모의 건물들이 방치되고 있음에 마음이 무거워 몇 컷 누르고 걸음을 재촉했다. 


 긴 지그재그 길이 한눈에 들어오는 '모스 테라레스' 능선에 올라 휴식을 취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어렵게 지나온 족적이 그대로 읽혀져 짠 하면서도 한편으론 흐뭇한 느낌이 들었다. 한 숨 돌리며 망연하게 앉아있는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에 젖은 듯 쉽게 자리 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공교롭게도 이런 코스가 계속 되었다. 힘겹게 비탈길을 올라 고개 위에 앉으면 까마득한 길 위에 한 점 피사체로 움직이는 순례객들의 모습, 지난한 삶의 길을 대변하는 듯 의미심장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투박하면서도 품위가 돋보이는 '이테로' 다리를 건너자 '팔렌시아 주' 표지석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대단한 두 다리가 부르고스 주를 지나 팔렌시아 주로 들어선 것이었다.


 여전히 한적한 마을 '보아디야 델 카미노' 에서 숙소를 마련했다. 능금 꽃이 막 개화하는 정원에서 투숙객들의 환한 웃음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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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5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11)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토산토스(29 km / 11일차)

 

찻길과 평행선을 이룬 까미노


 이른 새벽, 모처럼 상쾌한 기분으로 기상했다. 아마도 어젯밤 체리나무 아래서의 거사가 주효했던 모양이다. 한고비 무사히 넘긴 뿌듯함으로 북적대는 식당에서 시리얼과 요구르트로 아침을 해결하고 샌드위치를 싸서 다시 새로운 장도에 올랐다.

 

 

 


 13세기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건축물, 산토 도밍고 대성당을 지나며 나는 엉뚱하게도 닭 울음 소리가 들릴까 성당 담벼락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순례자 가족과 닭에 얽힌 이야기가 전설로 내려오는 대성당엔 오래도록 닭 두 마리를 실내에서 키워오고 있다고 한다. 성당 방문을 하지 못한 아쉬움을 이렇게라도 달래며 어제와 비슷한 길을 찾아나간다.


 오늘은 찻길과 평행선을 이룬 까미노를 오랫동안 걸었다. 빠름과 느림의 간극이 극명한 길 위에서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정도에 정비례,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 한다'는 밀란 쿤데라의 고견을 되새기며 걸었다. 


 벨로라도에 들어서자 노천 카페마다 일정을 마친 순례객들이 시원한 맥주잔을 기울이며 담소하는 모습이 마치 잔치마당 같았다. 그들 곁으로 끼어들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늘 지향했던 조용한 잠자리를 위해 6km 거리의 토산토스(Tosantos)를 향해 무거운 걸음을 계속했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한적한 산길이 바로 이어졌다. 오늘따라 이런 길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빗줄기가 굵어지는데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한동안 유유자적 걷다 보니 두 여인이 우리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산골 동네의 유일한 숙소엔 침대가 고작 서른 개 밖엔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바로 경쟁 모드로 돌입했다. 하지만 휘청거리는 걸음으론 신바람 나게 걷는 여인들을 당할 재간이 없었다. 


산 중턱의 숙소가 시야에 들어 올 즈음, 여인들은 성큼성큼 그 곁을 지나고 있었다. 괜한 경쟁심으로 신통찮은 발바닥에 또 불을 일으키고 말았다.


 큼직한 텃밭을 앞에 둔 시골집 알베르게에서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만들고 한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지구 곳곳에서 온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가족 같은 끈끈함으로 서로 격려하며 내일을 기약하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 

 

 

아타푸에르카 ~ 브루고스 (21km / 13 일차)

 


부르고스(Burgos)에 가면.


 안개 자욱한 마을 길을 벗어나 산기슭으로 접어들었다. 강렬한 아침 해도 안개에 갇혀서 맥을 못 추고, 기온도 떨어져 두꺼운 자켓을 꺼내 입었다. 거기다가 길 표식마저 흐려서 앞사람 뒤를 열심히 따라 붙었다. 맨 선두주자가 실수하면 줄줄이 길을 잃을 뻔 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간밤 내린 비에 촉촉해진 숲엔 수선화 군락이 사방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노란 수선화가 만개 할 오월 초쯤, 이 길을 지나게 될 사람들이 새삼 부러워졌다.

 

 

 


 어제 온종일 끼니를 소홀히 한 탓에 오늘은 초반부터 힘이 들었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정자 없다는 옛말처럼, 숲 속의 한적한 숙소는 인근에 마켓이 없어 다음 날은 점심 때문에 고생을 한다. 이런 날은 가끔 있는 카페도 보이지 않아 이중고를 겪기 마련이지만 오늘은 다행히 원하는 지점에 첫 카페가 보여 한시름 놓았다. 


 커피와 오믈렛을 시켜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간, 길에서 자주 만난 한 커플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원만히 해결하여 사랑스런 모습으로 다시 길 위에서 만나지기를 소망했다 


 부르고스(Burgos) 가는 길은 자갈길과 아스팔트길이 끝없이 이어져 지루했다. 어제 함께 방을 썼던 프랑스 아주머니가 이 길만은 버스로 건너겠다던 말이 이해가 됐다. 순례자들의 고충을 파악한 지 자체에선 코스 중간 중간에 경찰차를 배치하여 물과 도움 여부를 수시 물어왔다. 그리고 택시도 대기 상태로 편의 제공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부르고스에 가면. ' 으로 시작하는 대화가 앞뒤에서 자주 들렸다. 마치 지루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꿈꾸듯 대 도시에서의 일탈을 위안 삼아 어려운 고비를 넘어가는 듯 했다. 막상 우리도 그곳에 들어서니 마음이 흔들렸다. 


일정의 2/3 지점에서 과감하게 이탈하여 뜻 맞는 이들과 차이니스 레스토랑으로 갔다. 약간 불친절한 서비스와 다소 짠 음식도 감사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아량은 모두 까미노 덕이 아니었을까. 


 돌아오는 길에 라면 네 개와 케밥 두 개를 샀다. 작은 먹거리를 챙겨 들고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있었던가, 아마도 순례길에서 철이 드는 모양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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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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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30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기(10)-로그로뇨~나헤라(30 km / 9일차)

 

 

 

한걸음들이 모여서

 


 어슴푸레한 새벽녘에 길을 나섰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중세의 건축물 사잇길을 걸으니 그 시대 어디쯤에 있는 듯 묘한 기분이 들었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성당의 종탑과 긴 지팡이를 든 순례객의 모습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걷는 듯 했다. 매일 저녁 잠자리가 바뀌는 일이 번거롭긴 해도 새로운 곳에서 맞는 아침은 낯설어서 좋다.


 앞서 걷던 남편이 이 골목 저 골목 기웃거리기를 반복한다. 방향을 잡아주던 노란 화살표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마음이 조급하지 않은 것은 그 길 어딘가에서 우리가 원하는 표식이 불쑥 나타나리란 믿음 때문이다. 마음의 여유는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깨달음이 서서히 자리하기 시작했다. 


 아침 해가 금빛 사선을 그으며 로그로뇨 도심으로 비춰 들기 시작했다. 하루를 여는 사람들의 부산한 행렬 속을 누비며 우린 산길로 접어들었다. 숨을 헐떡이며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포도밭 길을 종횡무진 걸었더니, 며칠째 아득하게 보였던 설산 데만다(Damanda) 산맥이 한층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전엔 15km를 무난하게 걸었다. 간간이 미숫가루와 삶은 달걀로 허기를 달래기도 하고, 길가의 간이 바(bar)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몇 개의 산간 마을을 지나 나바레테 초입에 들어섰을 즈음, 대형 와이너리 광고판에 산티아고까지 576km 남았다는 사인이 눈에 띄었다. 일주일 여 만에 230km 나 걸었다니, 한 걸음 두 걸음의 의미가 새삼 크게 느껴졌다. 


 후반부엔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했다. 가장 큰 악재는 발바닥 물집이었고 평소보다 조금 무리하게 잡은 거리도 한몫 했지 싶다. 비틀거리며 나헤라 공립 알베르게에 들어섰다. 줄줄이 쳐진 빨랫줄에 빼곡히 널려있는 뽀송뽀송한 옷가지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막 산마루를 넘어가는 햇살의 혜택을 우리도 누릴 수 있을까, 부럽기만 했다.


 길 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평택에서 온 미주네 가족과 저녁을 같이 했다. 싱싱한 채소를 곁들인 한식 밥상은 하루의 피로를 거뜬히 물러가게 했다. 

 

 

 

나헤라~산토도밍고 델 라 칼사다(21 km / 10일차)

 

 

 

 

자원봉사자들의 위로에 힘 얻다


 아침부터 컨디션이 난조를 보였다. 온몸이 나른하고 몸살 기 마저 있었다. 이런 날은 앉은 자리에서 푹 쉬면 좋으련만 오전 8시엔 무조건 퇴실해야 하는 알베르게 규정상 그럴 수가 없다. 


문득 영혼을 울리는 '치킨 누들 수프' 한 그릇이 떠올라서, 라면 스프 국물에 파스타를 넣어 아침상을 차렸다. 하지만 라면 국물에 뜬 파스타가 거부감을 불러 몇 숟갈 억지로 흘려 넣고 이동 준비를 서둘렀다. 


 상큼한 봄바람을 맞으며 나헤리야 강변을 걷는다. 세월의 흔적을 안은 이끼 낀 강둑 넘어 아침 산책을 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평화스럽다. 자연과 적절히 조화를 이룬 인구 7, 8천의 작은 도시 나헤라는, 잠깐 스쳐가는 이방인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었다. 


기진맥진해서 들어오는 순례객들에게 시원한 레몬 물을 먼저 권하는 인심에다, 힘든 여정을 다 이해한다는 듯한 봉사자의 푸근한 미소며 눈에 보이지 않는 세심한 배려들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순례자가 아닌 봉사자로 돌아와 그들과 함께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꼬물거렸다. 


 오늘은 코스도 비교적 원만했고, 노란 유채꽃 길을 기분 좋게 걸었더니 컨디션도 한결 낳아진 듯 하다. 예정한 거리를 단축하여 산토 도밍고 대형 알베르게에 숙소를 정했다. 


일본에서 온 룸 메이트 노부부와 잠깐 대화한 다음, 빨래하며 점 찍어 두었던 뒤뜰로 갔다. 체리꽃이 만발한 나무아래 앉아서 발바닥 물집을 치료하는 사이, 옆에선 노 할아버지 한 분이 알베르게 50주년 기념 불꽃을 싱겁게 쏘아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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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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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3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기(9)-토리스 델 리오 ~로그로뇨 (8일차 / 21 km)

 

길 잃은 순례자들을 위한 '쿠폴라 정탑' 


 오늘도 그댄 안녕하신가? 싸늘한 기온에 잔뜩 움츠린 내 그림자를 보며 싱거운 인사를 청했다. 여기저기 조금씩 삐걱거리긴 해도 견딜 만 하다는 자문자답을 하며 어깨를 곧추 세웠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등지며 서쪽으로 내 닿는 길은 세상을 향해 내 자신을 조금씩 열어가는 길이다.

 

 

 


 까미노에 들어선지 일주일 여, 다른 사람들의 행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무거운 배낭을 차편으로 보내고 가볍게 걷는 사람, 아예 택시나 버스를 타고 한 두 구간 건너뛰기를 하는 사람, 자신의 배낭무게를 견디며 묵묵하게 걷는 사람 등 똑 같은 길 위에서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하는 모습이 우리의 인생길과 흡사하게 닮았다. 지나온 나의 인생길은 어떤 유형이었을까. 불현듯 마음 속에 들어온 생각에 잡혀서 걷느라 능선 하나를 담담하게 넘은 듯 하다.


 오전 내내 포도 농원을 이웃하며 걸었다. 산자락, 구릉지 가릴 것 없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거대한 포도 재배 지를 보니 이곳의 후한 포도주 인심을 이해 할 듯 하다. 이제 막 새순이 돋기 시작하는 앙증스런 포도나무는 순조로운 자연의 흐름과 지극한 농부의 정성으로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되리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질 좋은 이곳 포도주로 목마름을 해소 할지 내심 기대가 된다. 

 

 

 


척박한 자갈밭도 아랑곳 않고 새 움을 틔워내는 포도나무가 지금 우리의 모습인 듯 하여 눈길이 자주 그 언저리를 맴돌았다. 


 오늘 여정의 중간 지점인 비아나에서 점심과 휴식을 취한 후 산타마리아 성당을 한 바퀴 돌았다. 예루살렘의 성묘성당과 유사하게 지어졌다는 스페인 로마네스크 양식, 팔각형 평면 성당 쿠폴라 정탑은 길 잃은 순례자들을 이끄는데 오랫동안 주력했다고 한다. 뎅그렁, 뎅그렁 가슴을 파고드는 강렬한 종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역할에 목이 쉴 겨를도 없는 모양이다.


진정한 순례자란


 오후 네 시경 리오하의 주도 로그로뇨에 입성했다. 오늘은 조금 일찍 숙소에 들어가려나 했는데 왠걸 시내 통과하는 데만 두어 시간 족히 걸렸다. 육중하게 닫힌 알베르게 문을 두드리니 나이 지긋한 형제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숙소로 안내 해 주었다. 20여 개의 잠자리를 구비한 수도원 공립 알베르게는 고작 2층 침대 몇 개만 남겨놓고 있었다. 


달리 대책이 없으니 불편함을 감수하리라 다짐하는데, 친절한 형제님이 아래 칸 순례자와 상의하여 자리를 바꿔주었다. 흔쾌히 자신의 자리를 양보해 준 한국인 K님과는 이후 좋은 인연으로 이어져 함께 어려움을 헤쳐가는 동조자가 되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음날 점심 준비를 위해 시내로 향했다. 오랜만에 들어선 대형 마켓은 절제 중인 나를 향해 유혹의 손길을 수시 보내왔다. 하지만 오늘의 충만함은 내일의 아픔인 것을. 꼭 필요한 몇 가지만 손에 들고 부자가 된 양 행복하게 나왔다. 


 외출에서 돌아와 살그머니 숙소 문을 열었다. 깜깜하리라 여겼던 방안에서 더운 열기가 훅 끼쳤다. 스페인 순례자 안토니오가 헝가리 출신 재콥에게 다리 마사지를 해주고 있었다. 마사지의 강도가 얼마나 높았던지 안토니오 얼굴이 온통 땀으로 얼룩져 번들번들 했다. 


삼 십 여분이 지났을까. 또 다른 부상자 러시아 여인에게도 치료와 마사지를 병행하며 혼신을 다하는 그를 보면서 진정한 순례자란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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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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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8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기(8)

 

포도주 마을 이라체(7일차)
(아에기~토레스 델 리오 / 30 Km)

 

 

(지난 호에 이어)
 위 침대의 들썩거림에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다. 누적된 피로 때문인지 온몸이 묵직한데다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나는 느긋하게 내 식대로 하리라 다짐하며 슬리핑 백 지프를 목덜미까지 올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기저기 바스락거리는 소리하며 일부는 배낭을 메고 살그머니 문을 나선다. 더는 버틸 재간이 없어 눈을 비비며 주섬주섬 짐을 꾸린다. 일주일간 이런 생활을 하다 보니 환경에 적응하는 눈이 열린 듯 어둠 속에서도 별 어려움이 없다. 

 

 

 

 


다국적 사람들이 모인 주방에서 시리얼로 아침 요기를 하고 준비해둔 점심을 챙겨 문을 나선다. 새벽 공기가 제법 쌀쌀하여 옷깃을 여미는 사이 '부엔 까미노(좋은 순례길 되세요)' 하며 몇 사람이 우리를 스쳐 간다. 채비를 마친 우리도 그 사이에 끼어 길을 잡는다.  


'시작이 반' 이라는 옛말이 어쩜 이리도 명쾌한지 일단 시작하고 나니 그 많던 걱정들이 눈 녹듯 사라지고 오로지 걷는 일에만 전념한다.


 마을 길을 꼬불꼬불 돌아 산길로 접어들자 가까운 능선위로 검붉은 해가 막 떠오른다. 오늘 하루도 저 태양처럼 뜨겁게 살기를 다짐하며 한 컷 담는다. 우리의 뒤를 따르던 필립 씨도 일출 광경에 연신 셔터를 누르며 흥얼거린다. 


그와는 며칠 전 비 내리는 피레네 산맥 줄기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우중 산행을 함께 한 처지라 그의 환호에 충분히 공감한다. 길 위에선 조그만 인연이 긴 호흡으로 이어져 동행이 되고 때론 동지가 되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전력투구 한다.


물집 잡힌 양 발을 일회용 밴드로 도배하고 나선 이 아침도 마음은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상큼하게 걷는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내려야 하는 지와 같은 고답적인 물음은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믿고 소풍 가듯 밀밭과 포도밭 사이를 넘나들며 동행들과 담소도 하며 자유를 만끽한다. 


마침 와인과 생수가 무한정 제공되는 이라체 수도원에 닿아 수도 꼭지를 틀어 와인을 반 잔 받았다. 남녀노소 원하는 만큼 제공하는 이곳 인심에 감복하며 빙 둘러서서 와인 잔을 기울였다. 


오늘은 로스 아르코스를 향하여 30킬로미터 남짓 걸었다. 야트막한 산을 몇 구비 넘고 하산 길도 꽤나 어려웠는데 무난히 잘 마쳐 뿌듯하다. 다행히 산중턱 조그만 성당에 숙소를 잡았고 저녁 식사는 십여 명의 순례객과 성당 관계자들이 함께 만들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 


그리곤 다락방으로 올라가 각자의 방식대로 기도를 드리고 앞서간 순례자들이 남긴 편지를 자신들의 언어로 낭독했다. '날이 거듭될수록 다리는 튼튼해지고 가슴은 더 뜨거워 질 것' 이라는 멘토가 진실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내일을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듯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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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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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7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기(7)

 

아름다운 시라우키와 에스텔라를 지나(6일차)-(마네루~아에기 / 20 km)

 

 

 

 

 다른 때보다 순조로운 출발을 했다. 지난밤 비축해 둔 밀반죽으로 수제비를 끓여 아침을 해결했더니 온몸이 새롭게 깨어나는 듯 가볍다. 삼십 년 타국 생활에서도 바뀌지 않은 한식 마니아가 어줍잖은 서양식으로 고전하다가 방법을 찾고 나니 하루 내내 행복할 것 같다. 고된 노동의 끝을 이렇게라도 보상 받으면 좋으련만 이 길 위에선 쉽지 않다는 걸 안다.


 묵직한 느낌의 중세 마을 마네루를 벗어나 샛노란 유채 밭과 초록 물결을 이룬 밀밭 사잇길을 오래도록 걸었다. 검푸른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색의 향연을 바라보며 나비처럼 사뿐사뿐 때론 아이들처럼 촐랑거리며 걸었다. 심연에서 올라오는 감정 그대로 행하다 보니 연이은 자갈길과 진흙탕 길도 그런대로 참을 만 했다. 


 첫 동네인 3km거리의 시라우키 마을이 야트막한 야산 위에 그림처럼 서서 우리에게 손짓했다. 순례길 중 아름답기로 소문난 마을 시라우키가 하필이면 '살모사 둥지' 라는 뜻을 가졌단다. 아마도 질투의 화신이 이 동네를 넘볼까 봐 드센 이름을 붙였나 보다. 동네 바에서 달콤한 콘 레체 커피를 마시며 한동안 봄빛을 쬐었다. 작명의 진의와는 관계없이 아늑하고 향기로운 시라우키 마을로만 기억하고 싶다. 


 순례길은 짐과의 전쟁이라 할 만큼 무게에 민감하다. 어쩌다 간식거리를 조금 더 챙긴 날은 발걸음이 잘 나아가지 않는다. 길을 가다 보면 순례객들이 놓고 간, 티셔츠, 신발, 그 외 일용품들이 나무에 걸렸거나 폐기된 광경이 종종 눈에 띈다. 보기에 좋은 그림은 아니지만 그들의 상황을 십분 이해하며 가벼운 여정이 되길 바라는 심정이다. 


무게도 줄일 겸 이른 점심을 위해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기껏해야 과일, 빵, 음료 정도인데 꺼내고 나니 배낭이 많이 가벼워진 듯하다. 내친김에 불필요한 물품은 없는지 다시 배낭을 점검한다. '시골 사람이 서울 갈 때엔 눈썹도 빼놓고 간다'는 옛말처럼 그리고 칫솔마저도 반으로 잘랐을 정도로 간편하게 배낭을 꾸린 LA에서 온 도보여행가처럼 매의 눈으로 나의 탐심을 살펴나간다.


 오후 네 시경 아름다운 별의 도시 에스텔라에 도착했다. 강을 사이에 두고 형성된 제법 큰 도시의 귀퉁이에서 앉아 오늘의 잠자리를 구상했다. 하루 일과가 마무리 되면 잠자리를 찾는 게 부담이면서 또 즐거움이다. 우리는 도시의 번잡함을 피해 2 km 넘어 조그만 타운의 알베르게로 향했다. 


숙소에서 한국에서 온 남녀를 만났다. 대뜸 이 숙소를 오게된 연유를 묻길래 그냥 발길 따라 오게 됐다고 했더니 깜짝 놀란다. 아날로그 식인 우리와 달리 그들은 실시간 한국 경험자들과 소통하며 어렵게 찾아 온 곳이란다. 삼백 명이나 되는 열혈 애호가들이 추천해준 숙소에서 와인 잔을 기울이며 새로운 인연을 운명처럼 맞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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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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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2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기(6)

 

'용서의 언덕'과 천의 얼굴 십자가(5일차)
(자리키에기~마네루 / 18km)

 

 


 간헐적으로 흩날리는 비를 맞으며 새로운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또 어떤 그림들이 내 안으로 들어 올까. 선뜻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하체에 비해 머릿속은 장밋빛으로 내달렸다. 길에서 하루의 시작과 끝을 맺는 단순한 일상이지만 수많은 만남이 함께 하고 있어 내심 기대되는 첫 걸음이다. 


 대도시 팜플로나에서 많은 순례자들이 유입되었는지 까미노는 전에 없이 활기가 넘쳤다. 이제 시작하는 사람들의 힘찬 움직임 사이로 5일차 선배들이 약간 지친 몸짓으로 묵묵하게 줄을 잇고 있는 모습이 정겹다. 어제 다리 상태가 많이 안 좋았던 S와 J가 우리보다 훨씬 위 지점에 있어 안심이 되었다.


 해발 770m 페르돈 고개(Alto de Perdon)를 향해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일명 '용서의 언덕'이라 명명된 연유는 순수한 자기 자신을 찾기 전에 마음 속 앙금부터 지우라는 의미일 게다. 한 발 두 발 산을 오르면서 무질서하게 떠오르는 영상들을 반추해 본다. 


특별히 누군가를 용서하기 보다 오히려 내 자신이 미흡하여 용서 받아야 할 일이 더 많은 것 같다. 너와 나의 불편한 관계를 정리라도 하라는 듯 성당의 종소리가 가깝게 울려왔다. 순도 백 프로의 청량한 울림에 그저 감사함으로 응답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사해야 할 요인들이 이렇게 차고 넘치는지를 미쳐 깨닫지 못한 우매함에 코끝이 시큰했다. 


 사방이 확 트인 산 꼭대기에 순례자들의 여정을 형상화한 조각상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누군 말을 타고, 또 어떤 이는 달리기를 하며 다다르고 싶은 그곳은 산티아고 보다 더 간절한 어느 곳이 아닐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순례자들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조각상들 사이에서 포즈를 취했다. 


늘씬한 영국 청년 매튜는 우리 부부의 사진을 찍어준 게 인연이 되어 한동안 서로 길동무가 되었다. 까미노의 큰 매력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다가서고 친구가 된다는 점이 아닐까. 


하산 길은 평지가 나올 때까지 자갈이 깔려 있어 꽤나 진땀을 흘려야 했다. 그런 와중에 발바닥 물집과 골반 결림 그리고 힘에 부치는 배낭은 우리가 안고 가야 할 몽니였기에 감히 불평조차 할 수 없었다.


 중세 시대의 다리 이름이 곧 도시명이 된 레이나에서 스페인 대표 음식 빠에야와 생맥주로 모처럼 제대로 된 점심 식사를 했다. 주 재료가 우리에게 익숙한 쌀과 해산물로 요리된 빠에야는 친숙한 듯 하면서도 겉도는 묘한 느낌의 음식이었다. 마치 유럽과 동양의 차이만큼 이랄까.


 식사 후엔 봄 기운이 만연한 숲길을 기분 좋게 걸었다. 되도록이면 길 위에서 오래 머물며 천천히 걷고 싶은 우리와 달리 사람들은 빠르게 그들의 길을 재촉한 끝이라 자연히 숲은 독차지가 되었다. 덕택에 여유롭게 새소리, 숲의 적막함을 마음껏 누리며 마지막 능선에 올랐다. 


잔잔하게 끝날 것 같았던 오늘의 여정은 마지막 클라이맥스를 예비하고 있었다. 수백 미터에 달하는 철조망에 매달린 각기 다른 모양의 십자가들, 자연에서 채취한 비슷한 소재로 엮어 만든 천의 얼굴, 순례자들의 소망이 빈틈없이 매달려 있었다. 이 구간을 걷는 내내 그들의 열망대로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곡히 바래며 숙소지 마네루에 입성했다.


 동네 깊숙이 자리한 마네루 공립 알베르게는 6유로의 저렴한 숙박비에 비해 환경이나 시설이 다른 곳보다 월등했다. 무엇보다 깔끔한 부엌이 마음에 들어 식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마켓을 찾았다. 하지만 너무나 조용한 동네 분위기는 일요일은 무조건 쉰다는 암약이 있었음이리라. 


빈손으로 돌아 온 우리는 알베르게 주인장 마리오네에게 무조건 매달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에게서 수제비 재료들을 제대로 구입하여 모처럼 땀 흘리며 흡족하게 한 그릇씩 비웠다. 주인장 마리오네 아저씨도 우리의 수제비 맛에 반해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 


 간절히 원하던 한 끼 음식으로 행복이 극에 달했던 하루의 끝이 이렇게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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