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BC
추천업소
추천업소 선택:
추천업소 그룹 리스트
  • 식품ㆍ음식점ㆍ쇼핑1
  • 부동산ㆍ건축ㆍ생활2
  • 미용ㆍ건강ㆍ의료3
  • 자동차ㆍ수리ㆍ운송4
  • 관광ㆍ하숙ㆍ스포츠5
  • 이민ㆍ유학ㆍ학교6
  • 금융ㆍ보험ㆍ모기지7
  • 컴퓨터ㆍ인터넷ㆍ전화8
  • 오락ㆍ유흥ㆍPC방9
  • 법률ㆍ회계ㆍ번역10
  • 꽃ㆍ결혼ㆍ사진11
  • 예술ㆍ광고ㆍ인쇄12
  • 도매ㆍ무역ㆍ장비13
  • 종교ㆍ언론ㆍ단체14

 

 성선설(性善說)은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고 보는 견해로 중국의 철인(哲人) 맹자가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쁜 환경이나 물욕(物慾)은 착한 본성을 가리기 때문에 악한 일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는 견해로서 뒷날 유가(儒家)의 정설(定說)이 되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이 선천적으로 악하다는 중국의 철인 순자의 학설입니다. 그러니 예(禮)를 배워 악한 마음을 통제하는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 두 개의 상반되는 주장의 시비를 가릴 때 예외없이 '증거'로 나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즉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위태로운 순간 아무리 흉악한 살인자라 해도 거의 반사적으로 얼른 손을 내밀어 그 아기를 붙들어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성선설 측에서 내놓은 '증거'지요.


 이 두 가지 설을 두고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수천 년을 두고 시비를 했건만 눈곱만큼의 결론도 나지 않고 있습니다. 본래 성선설이 맞느냐, 성악설이 맞느냐 따위의 시비는 과학이 들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21세기 과학, 특히 북미대륙의 과학은 경험주의(Empiricism)에 그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즉 과학적 연구대상이 되려면 객관적으로 측정될 수 있고, 경험으로 '있다' '없다'가 판단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명제가 적합하지 않은 경우도 많겠지만 어떻든지 경험주의야말로 지금까지(특히 북미 대륙에서는) 자연과학과 심리학 같은 사회과학을 지배해온 하나의 큰 과학 사조(思潮)입니다. 성선/성악설 같은 것은 객관적 측정부터가 불가능한 형이상학적(metaphysical)인 문제이기 때문에 철학 종교학자들의 논쟁거리는 되어도 과학적 연구의 대상은 되지 못합니다.


 성선/성악설로 돌아가겠습니다. 아기를 붙잡아 주려고 손을 내미는 사람은 순간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이 아이의 엄마 아빠가 직장을 하나 구해주겠지."하는 기대심리? "착한 행동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서 신문 방송에 소개되고 표창장까지..." 아니면 "나도 착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는 자찬(自讚)에 그치고 말까요?


 맹자는 아기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순간은 기실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도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저절로 스프링처럼 튕겨 나오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남을 도와주려고 하는 따뜻한 마음은 사람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이 맹자의 주장입니다. 이런 마음을 소중하게 간직해서 자라면 이것이 곧 석가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말이지요. 남을 도와준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로 마음이 급하다든지 초조할 때는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이 줄어들지 않습니까. 그러니 남에게 신경을 써주고 남을 도와주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정신적으로 건강하냐 아니냐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말입니다.


 성선설을 조금 확대해 보겠습니다. 인간이 타고난 본성을 키워서 가족뿐만 아니라 만나는 사람 모두를 사랑으로 감싸줄 수 있다면 우리 세상은 예수, 부처, 공자 같은 성현들로 꽉 차서 이상적인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매일 낯모르는 사람들과 수없이 만날 뿐 아니라 그 주에서 경쟁관계, 이해관계가 얽힌 만남이 있을 것이니 모든 사람에게 사랑으로 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나도 윤리학자 김태길 교수가 한 말대로 인(仁)이니 의(義)니 예(禮), 지(智), 신(信) 따위도 좋긴 하지만 시대감각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남을 도와준다는 말도 그 '남'이 전통사회 시절의 부모, 형제, 마을 사람들이 아니요 듣도 보도 못하던 사람일 때는 도와준다는 의미가 희미해질 때가 많지요. 그러니 현대사회에서 남을 도와주려는 손을 내밀기 위해서는 '나[我]'라는 테두리를 넓혀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대부분은 극히 좁게 정의된 '나'의 테두리를 정해놓고 그 테두리 밖으로는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요.


 내 앞길만 내다보며 내 자신만 돌보기에 바쁘다는 점에서 이기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드물지 싶습니다. 그러나 석가나 예수 같은 성인은 '나'의 테두리가 극히 넓기 때문에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내' 안에 끌어들일 수 있지요.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선한 마음, 착한 마음 둘 다 가지고 있는것 같습니다. 사람이 몹시 악한 일을 저질렀을 때는 감옥으로 갑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 이웃에 사는 사람들은 감옥에 더 많이 가고, 착한 사람 이웃에 사는 사람들은 감옥에 덜 갑니다. 이걸 보면 성선, 성악의 본성이란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위 환경에 많이 달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2. 9)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WWW.AHAIDEA.COM
4065 CHESSWOOD DR. NORTH YORK, ONTARIO,M3J 2R8, Canada
[email protected] | [email protected]
Ahaidea
캐나다 daum.ca와 대한민국 daum.net은 관련성이 없습니다.
Copyright © 2024 AHAIDEA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