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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산 옛 절간에/목련이 피어있네/동봉(東峯)에 달 오르니/열경이 와 섰는듯이…(古寺空山?…猶似悅卿來)’

 


 위의 오언절구는 조선 순조-고종 때의 학자 서응순이 설악산 오세암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읊은 노래로서 손종섭 님의 번역에서 빌려온 것이다. 오세암이란 내설악에 있는 작은 암자의 이름 오세암이라는 이름의 내력은 이렇다.


 세조가 조카 단종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자기가 그 자리에 앉는 패륜행위를 저지르자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은 문을 걸어 잠그고 밤낮 통곡하며 문밖을 나오지 않다가 하루는 갑자기 일어나 방에 있는 책을 모두 불사르고 하산해서 중이 되었다. 조선 팔도 방방곡곡을 방랑할 적에 몸을 기탁해서 유명해진 암자가 바로 오세암이다. 


 영조 때의 문신이요 정다산의 족친으로 ‘설악산 유람기’를 쓴 정범조에 의하면 어려서 오세신동(五歲神童)으로 이름을 날리던 매월당이 커서도 스스로 오세동자로 부른데서 오늘의 암자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위의 시에서 “동봉(東峯)에 달 오르니”의 동봉은 동쪽 봉우리라는 말도 되지만 김시습의 아호도 되고 “열경(悅卿)이 와 섰는듯이”의 열경은 김시습의 자(字: 본 이름 부르기 위하여 짓는 이름, 흔히 장가를 간 뒤에 본 이름 대신으로 부름)이다.


 서응순은 평소에 매월당을 몹시 존경하고 추모하던 선비. 그래서 그 한적하고 쓸쓸한 옛 절에서 매월당이 서 있는 환영(幻影)을 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세암’ 시인 서응순 보다는 ‘오세암’이라는 암자 이름의 연원이 되는 매월당 김시습을 더 생각한다. 


 매월당은 1435년, 세종 17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호는 매월당 혹은 동봉(東峯), 신동(神童)으로 알려진 그는 두 살 때 글을 깨치고 다섯 살 때는 ‘소학’ ‘대학’을 읽어 소문이 나자 세종대왕이 친히 불러 접견, 장래에 크게 쓰겠다는 전지를 내렸다 한다.


 방랑길에 경주 남산에 머물 때는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써서 그가 평생 꿈꾸던 충(忠)과 효(孝)에 기반을 둔 왕도정치의 이상을 그리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 자기의 꿈이 헛된 것임을 깨닫게 된 매월당은 크게 실망, 환속(還俗)하여 안씨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매월당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즉 세조가 임금이 되자 그의 참모 한명회는 한없는 부와 명예와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자기는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게 사는 욕심없는 사람이란 말을 듣고 싶어서 지금의 압구정동, 그러니까 한남대교와 영동교 사이에 정자를 하나 짓고 중국 송(宋) 나라 임금의 등극을 도운 한충헌을 자기와 동일시하여 정자 이름도 한충헌과 같이 ‘갈매기와 벗하여 논다’는 의미의 압구정(狎鷗亭)이라고 하였다.


 한명회 자신이 지은 작품인지 아니면 연회에 초청된 어느 아첨 선비가 지어 바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압구정에는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젊어서는 나라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늙어서는 강호에 한가로이 드러눕는다)라는 주련(柱聯)이 하나 있었다. 평소 한명회를 더럽고 간특하고 욕심 많은 사람으로 경멸하던 매월당이 이 대련(對聯)을 보고 부(扶)자와 와(臥)자 대신 망(亡)자와 오(?)자를 靑春亡社稷/ 白首汚江湖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로 만들어 그를 비꼬았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길이 없다.


 부귀와 권세가 하늘에 닿고도 남을 한명회도 죽고 난지 채 20년이 못되어 갑자사화가 터지자 연산군의 생모 윤씨가 사약을 받고 죽은 일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무덤을 파서 관을 쪼개고 목을 베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죽고 나서 60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그는 충청북도 천안시 병천 어느 야산에 한 줌의 흙으로 남아있다. 그가 누렸던 부귀 영화 또한 풀잎에 맺힌 아침 이슬 방울일 뿐. 


 ‘한국의 묘지기행’이란 책을 펴낸 고제희를 따르면 한명회의 묘비석에 새겨진 비문은 누군가 그라인더로 힘껏 갈아 도저히 글자를 알아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를 비웃고 세상의 부조리를 탄식하던 매월당 역시 부여 무량사의 무진암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오세(五歲) 김시습 지 묘’라 쓰인 김시습 부도(浮屠) 속에 한 줌의 재로 남아있다. 이렇게 보면 삶이란 결국 세월에 스쳐가는 한 줄기 바람,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만약 한명회가 부귀영화와 권세를 쫓지 않고 개성 창덕궁의 문지기로만 있었으면 사육신도 없었고, 오세암도 옛 이름 한계사(寒溪寺)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 이 따위 가정들이 무슨 소용 있으랴. 바람은 600년 전이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불어오고, 오세암 동봉의 달은 뜨고 지는 천도의 순환을 되풀이 하고 있다. 


 사람들은 인생이 덧없다 꿈이라면서도 한 발이라도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조바심을 낸다. 오늘도 한명회의 DNA를 물려받은 사람들과 매월당의 DNA를 물려받은 사람들이 각기 서로 다른 인생관을 가지고 ‘이게 진짜 인생이다’ ‘저게 진짜 인생이다’고 서로 다투며 제 나름대로 멋을 부리며 살아가고 있다. (201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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